지성의 샘터

마녀사냥꾼에게 고한다

이성수
2020-08-27
조회수 379

<교회에 씌워진 프레임과 칼춤 추는 마녀사냥꾼>

알버트 까뮈는 페스트라는 책에서 염병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두려움에서 의심과 혐오와 증오를 거쳐 희생양 찾기로 전개되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동안 진보그룹은 차별과 혐오를 막아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해 오면서 차별과 혐오를 주도하는 반인권 집단은 기독교세력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왔다. 정말 신기하게도 대중은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 결과는 지금 코로나사태와 맞물려 사회 곳곳에서 교회에 대한 역차별과 심각할 정도의 혐오로 표출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단순히 다종교사회의 갈등현상일까? 아무리 너그럽게 생각해도 정치계의 의도적인 프레임정치, 혐오정치의 결과물이라는 의혹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은 지나친 판단인가? 왜 교회를 상대로 그런 몹쓸 짓을?

 역사적으로 보면 구한말시대 이 땅에 들어온 기독교는 왕정하에 억압받고 소외당하고 가난하고 빚지고 억울한 대다수 백성들에게 자유와 평등, 그리고 진정한 인권인 인간존엄성을 일깨웠고 나라사랑 민족사랑의 정신을 펼쳐나갔다. 외세종교라는 배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토착종교도 해내지 못한 "백성을 위한 섬김"을 온몸과 마음으로 실천해냈다. 그 뿐인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주독립운동을 최선두에서 이끌었고 타종교와도 연합하여 일했다. 독재시대를 거치면서 민주화운동에 앞장섰고 경제발전의 정신적 기조를 확고히 하는데 절대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기독교의 대사회, 대민족적 역할은 정치,경제,문화,교육,의료,복지,스포츠,언론 등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한국기독교 100년의 역사는 그야말로 나라사랑, 민족사랑의 신앙정신에 바탕을 둔 숭고한 발자취 그 자체임을 역사적인 사실들이 고스란히 증명해 주고 있다.  
물론 호사다마의 상황은 없을 수 없다. 인간은 완벽하지 못하다. 교회 역시 부족한 인간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교회가 민폐,즥폐 집단으로 내몰리고 차별과 혐오정치의 희생양으로 굴러 떨어진 데에는 기독교 내부의 불건전성과 진리에 미치지 못하는 부족함이 빌미가 되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고 극히 미미한 부분일 뿐이다. 절대다수의 교회는 묵묵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지역사회를 섬기며 빛과 소금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비본질적인 것들을 빌미로 정치프레임화하고 언론을 통해 온갖 혐오적 비판을 쏟아내며 집중,반복,편파보도로 교회때리기를 하면 뒤를 이어 정치인들이 정치적제재를 가하는 상황ㅈ이 지난 8개월간 지속되었다. 이는 빈대 잡자고 초가삼칸 태우는 격이 아닐 수 없다. 대중은 정치와 언론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는다. 가히 지배적 권세를 거머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권세의 칼을 함부로 휘둘러 국민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종교를 싸잡아 일반 영업장 취급하고 특히 교회에 집중타를 가하는 것은 국민 모두에게도 오판의 피해를 주는 혹독한 차별적 행위이다.

최근 이코노미스트가 문재인 정부의 내로남불 행태를 비판했다. 영국의 대표적 시사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8월 22일(현지 시각)"민감한 서울"이라는 제목의 컬럼에서 ‘한국의 진보 통치자들이 내면의 권위주의를 발산한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남을 향한) 비판을 뿜어내던 사람들이 자신들을 향한 비판은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고 지적했다.
인권 변호사였던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초반 '이전 정부보다 더 개방적이고 반대 의견에 관대한 정부를 만들겠다'고 했다. 하지만 지난 3년 이 정권이 보인 행태는 한마디로 내로남불이다. 의견청취는 커녕 반대의견에 대해 무자비한 비판과 혹독한 협박이 뒤따른다. 같은편도 잘라내고 소송을 제기한다. 심지어 반대의견을 틀어막기 위한 법을 만들려고 한다."종교의 자유도 국민에게 피해를 준다면 허용하지 않겠다."는 문대통령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한국에서 방역을 제일 잘하고 있는 교회를 향해 예배금지 명령과 더불어 협조하지 않는 교회에 공권력을 투입하고 수많은 교회에 공무원을 보내 감시하였다. 거의 전체주의적 독재자가 하는 "칼을 휘두르는" 양태다. 왜 어렇게 민감할까? 그럼에도 지지도를 유지하는 이유는 단 하나, 문정부의 전매특허인 "프레임화와 희생양 만들기"가 대중들에게 기가 막히게 먹히기 때문이고 충직한 망나니부대가 온 몸바쳐 충성하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세종대왕이 1425년 남겼다는 말을 인용한다. “나는 고결하지도 않고, 다스리는데 능숙하지도 않소. 하늘의 뜻에 어긋나게 행동할 때도 분명히 있을 것이오. 그러니 내 결점을 열심히 찾아서 내가 질책에 응답하게 하시오.”
지금 국민들 위에서 태왕,상왕,상전노름에 재미들린 정부고위당직자들이 앞으로 살 길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게다.

 칼은 칼집 안에 있을 때 안전한 것이다. 내면의 권위여야 한다는 말이다. 칼자루 쥐고 있다고 아무때나 뽑아 휘둘러 대다 보면 그 칼에 내편도 베일 수 있고 끝내는 자기를 찌를 수도 있다. 절제되고 고상한 의지로 통제되는 내면의 권세만이 모두를 유익하게 한다.
권세자들은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야 한다. 언론은 더 이상 칼춤 따라 덩실대는 망나니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래도 툭하면 칼을 꺼내 휘두르기를 즐기는 권세자에게는 이런 충고가 약이 될것이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리라"는 예수님 말씀이다.

 또한 대중은 더이상 마당불을 향해 날아드는 부나비가 되어서는 안된다. 언제까지 개,돼지 취급받을 것인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외친 프라하의 봄을 가슴 한켠에라도 새겨두라. 자유는 꺾을수 없는 의지와 놀라운 복원력의 근저다. 당신들의 조상들이 무지몽매하여 압제속에서 짐승취급 받으며 살아갈때 민족의 자유를 위해 투쟁해온 기독교의 놀라운 업적을 눈꼽만큼이라도 기억해보라. 당신들의 현존은 곧 교회의 희생의 결과임을 결코 망각하지 말라.

 사방에서 돌이 날아온다. 너도 나도, 돌을 던진다. 왜 던지는 줄도 모르고 던진다.  누구를 향해 던지는가?  결국 그것은 부메랑이 되어 자신들에게 돌아올 것이다. 지금은 남에게 던지지만 그 "남"은 곧 자신의 처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역사는 순회한다. 그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다만 잠깐을 스쳐가는 "나그네"일 뿐이다. 그 누구라도....

프레임 생산자여!
혐오의 앞잡이여!
칼춤 추는 망나니여!
너 자신을 알라!

2020.8.27.이성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