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의 샘터

이승만 타임지 커버스토리 1탄

이성수
2019-06-25
조회수 84

1950년 9.28 서울 수복후 타임지 기록

<6.25 터진 뒤 3개월 후 이승만.>

ㅡ을 다룬 TIME 커버 스토리를 몇 해 전 번역해 올린 바 있는데, 끝 부분을 시간이 없어 미루다, 마저 이어 번역했다. 사실은 끝 부분이 중요한 것을.

현 시점의 6.25를 지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내용. 특히 6.25때 ‘다리 끊고 도망간 대통령’으로만 배운 분 필독.

1) 6.25가 무엇이었는지.
2) 70년 전 타임 기자가 붙여준 <국부>라는 의미가 뭐였는지.
2) 그 미국인 기자 눈에 비친 우리의 위대한 ‘김구’는 어떠했는지.
3) 전쟁 속의 희망이란 무엇인지...

[이승만이 TIME 커버 모델이 된 것은 총 2회이다. 한 번은 1950년 10월 16일 그러니까 6.25가 터진 뒤 3개월 후. 그리고 또 한 번은 1953년 3월 9일, 즉 정전협정 4달 앞두고서. 두 번째 것은 지난 해인가 완역을 한 바 있다. https://www.facebook.com/pentalogia/posts/2054984074534001]

* 앞서 미완역본을 읽으신 분은 [컨퍼런스 & 크로케] 부터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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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her of His Country?
Monday, Oct. 16, 1950

자신의 나라에서 난민으로 3개월을 보낸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Syngman Rhee)은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패전한 공산당 군대가 남겨둔 쓰레기 더미로 어지럽혀진 그의 관저를 찾았다. 소련 신문 이즈베스챠(Izvestia) 뒷장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 쓰레기들이 치워지고 대통령 숙소에 대한 정밀 수색이 있었다. 조사에 따르면 공산당이 점령한 동안 그곳에 주둔시켰던 러시아 민간인들은 이승만에게 가장 값어치 나가는 재산인 ‘가재도구’들은 미처 챙기지 못하고 내뺀 것으로 나타났다. 그 ‘화려한’ 재산 외엔 몽땅 가져갔다. 그 때문에 영부인 프란체스카가 불편을 겪어야 했다. 한 겨울에 북쪽을 향해 도망치는 러시아인들이 여사의 겨울 속옷을 포함, 외투까지 다 훔쳐 달아났기 때문이다.

흡사 전쟁이 일어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이승만의 지난 주 일과는 규칙적인 패턴으로 돌아왔다. 매일 아침 6시 30분 기상, 그리고는 서양식 아침 식사를 ― 주로 커피, 과일주스, 시리얼, 계란들로 된 ― 들기 전에 정원을 잠시 거니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이 대통령의 손님에게는 대개 필리스 시가 또는 한국 담배가 제공되었다. 이승만 자신은 건강상의 이유로 거의 시가를 피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욕실에서 혼자 있을 때만 그걸 피웠다. 한 방문객은 미제 사탕을 선물로 받고서 감사하기도 했다. 하루 일과가 끝날 때쯤이면 이승만은 눈에 띄게 지쳤다. 밤은 크게 그를 회복 시켜놓지를 못했다. 그에게는 불면증이 있었다.

그렇게 지친 이승만의 어깨에는 한국의 부흥과 통일(a revived and unified Korea)의 희망이 달려있다. 이승만의 강력한 반(Anti) 소련 노선은 자연스럽게 그를 코민포름(공산주의 선전기관/ 역자주) 선전의 타겟으로 만들었다. 그를 반대하는 소요는 진보주의와 노동자 그룹 특히 프랑스, 호주 그리고 인도 안에서 거셌다. 미국에서는 마치 중국의 장개석으로부터 이탈한 많은 사람을 정직하지만 순진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그런 종류의 비방 캠페인이 그를 괴롭혔다. 그것은 사실이기도 했다. 이승만은 때때로 그의 반대자의 인권을 임의로 억압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이러했다.

1) 그는 철저하게 반공이었다.

2) 그는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3) 그는 공정하게 선출된 대통령이었다. 그것은, 만약 오늘 다른 표가 주어졌더라면 정권이 다른 쪽으로 넘어갈 수도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서 유일한 사람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쨌든) 그의 방식과 방법에 관한 자국민의 평가가 어떻든 간에 미국과 유엔 회원국들은 이승만과 함께 일해야만 했을 것이다.

[삽 & 빗자루]

지난 주 서울 시민들은 자기네 대통령처럼 그들의 익숙한 방식으로 파괴된 나라의 피해 복구에 여념이 없었다. 미국의 지프, 탱크와 트럭들의 소음들이 울리는 가운데, 무수한 한국의 노동자들이 전쟁 잔해 속에서 쓸만한 고철을 분류하고 퇴각한 빨갱이들에 의해 유기된 모래주머니들에서 작은 파편들을 운반하였다.

미국 대사관 앞에서는 거지 아이들이 사탕을 달라고 미군 병사를 졸라댔고 어른들은 청원서들을 들고 나와서 미군 장교에 접근을 시도했다. 그곳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영어를 좀 할 줄 압니다. 미국인들과 통역으로 일하기를 원합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빗자루도 없고 삽도 없습니다. 제발 일을 주십시오.”

통역을 원했던 그들 대부분은 ‘기술자들’이라고 했는데, 그러나 그들은 사실 쉽게 삽과 빗자루를 구할 수 있었고 서울의 잔해 현장으로 가서 일할 지시를 이미 받았음을 감안할 때, 그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암시장은 비누, 모피 코트, 미군 돼지고기와 콩, 스트렙토마이신(결핵치료제/ 역자주) 매매를 위한 흥정으로 붐볐다. 공산주의자들은 암시장(the black market)을 근절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렇게 지나치게 규제해서는 정상적인 시장(the white market)의 숨통마저 끊어놓을 뿐이었다.

서울은 복구를 마치려면 여전히 갈 길이 멀기만 했다. 도시의 60% 이상이 파괴된 상태였고 재건축은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다. 무엇보다 식수원이 없었다. 주 전력원도 없었다. 전차는 트랙에 그대로 서 있었다. 철길에는 폭격으로 타버린 화물차들이 수백 대가 누워 있었다.

한국의 대다수는 서울의 문제를 공유하였다. 이전 교두보였던 부산에는 4백만의 시민이 비교적 평화로운 시간을 갖고 있었는데 지난주에 2백만 명의 난민을 추가로 받았다. 의식주가 부산과 미군에 달려 있었다. 한편 북한은, 이 전쟁이 만주 국경으로 밀려올라가면서, 이미 그 공화국은 악으로 비대해진 빨간 얼굴의 소련 총독 슈티코프(Terenty Shtykov)가 장악하고, 그리고 뚱뚱하데다 졸린 눈을 한 한국의 공산주의 수괴 김일성이 권좌에 올라탈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농민들에게 분배’와 ‘산업의 국유화’를 명목으로 땅을 몰수해갔다. 그 소유권과 보상에 끝없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승만은 북한군에 대한 보복에 반대하는 정책을 발표했음에도 그 공산주의 잔당들에 대한 징벌과 교화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었다.

[선비이자 학자]

미국과 유엔 양측은 모두 한국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ECA(경제협력국/ 역자주)는 이미 최선의 재건을 위하여 자금을 어떻게 사용하는 게 좋을지 확정 짓기 위한 설문조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한국인의 눈에는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우선적 책임은 이 백발의 이승만(이승만의 성씨인 Rhee는 Bee[꿀벌]를 연상시킨다)에게로 기울어 있었다. 그의 선비 된 조상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 아래서 이승만은 오랜 민족의 전통을 따랐다.

이승만이 태어난 해인, 지금으로부터 75년 전은 한국 귀족만을 위한 불변의 법칙이 지배하던 세상이었다. 그것은 신사(선비)란 꼭 학자여야만 하고, 또한 그 학자들이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법이었다. 이승만의 아버지는 1392년에서 1910년에 이르는 이씨(조선)의 후예였다. 그의 아들은 중국어와 유교식 전통 안에서 한국 선비 교육을 받도록 준비했다. 이승만은 열심히 전통적인 학습을 했다(그는 여전히 중국고전시를 쓴다). 그는 젊은 학자들이 관료로 등용되는 한국의 국가시험에서 1등을 차지했다.

그런 학문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즉시로 정부에 들어가지 않았다. 1895년 한국은 독립 상태였지만 러시아와 일본 제국 양쪽으로부터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었다. 영민하게도 이승만은 서양 교육과 영어로 된 지식이 결국에는 미래의 한국 정부에 유용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이승만은 서울에 있는 배재 대학교와 감리교 선교 학교의 학생이 되었다. 배재대에서 그는 영어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서양 정치사상에 노출되었다.

[추밀원과 교도소]

이승만은 한국 군주제와 입헌 정치의 개혁을 요구하는 민족주의 조직인 독립협회에 합류했다. 그는 또한 한국 최초의 일간 신문의 발간을 도왔다. 그것은 한국 내에서 일본 영향력 증대에 맞서 격렬하게 싸운 매체이다. 독립협회가 투쟁의 송곳니를 드러낼 무렵, 한국의 망령 난 황제 고종은 추밀원에 이승만을 임명했다가 그 협회 지도자 17명 이상을 감옥에 잡아 가두면서 그를 함께 잡아들였다. (이승만은 후에 석방되었다) 1897년 이승만은 정부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데모를 주동함으로써 추밀원 위원으로서 권한을 월권했던 것이다. 그는 지체 없이 스스로 감옥으로 들어갔다.

감옥에서 이승만은 최고 등급의 정치범들을 위해 고안된 처우를 받았다. 팔에 기름종이를 두르고 연소시키기, 삼각 막대로 때리기, 손톱을 으깨는 등의 고문을 매일 받았다. 그리고 그의 목에는 20파운드(약 10kg)짜리 칼을 걸치고 있었고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6개월 후 그는 종신형을 선고 받았고 그것으로 그에게 행해지던 고문이 중단되었다. 그는 다른 감옥으로 옮겨졌다. 그는 신문 게재를 위한 글을 밀반출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감옥에 있는 여러 해 동안 《독립정신》을 썼다. 이승만을 민족운동의 영적 지도자로서 정립시킨 이 책은 한국 애국자들의 상상력을 장악했다.

일본이 한국 황제를 폐위하고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제국으로 합병하려던 해인 1910년, 이승만은 측면에서 정치적 소요를 제기하는 YMCA 활동가로서 한국에 돌아왔다. 모든 기독교인을 불신하던 일본은 이승만을 갑절로 불신했다. 그들은 윤평희라 불리는 경찰 에이전트를 이승만의 영원한 그림자로 고용했다. 그는 일본에 은밀히 부역하는 한국인들 즉 악질적인 ‘사냥개들’ 중 하나였다. 원시적 심리전의 전문가였던 윤평희는 부지런히 이승만에 관한 소문을 퍼뜨렸다. 어느 날 이승만은 YMCA에서 빌린 한 작은 방에서 자고 집에서 떨어져 밤을 보낸 일이 있었다. 그날에 있었던 일을 이승만은 이렇게 술회했다.

“다음 날 아침, 나의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그 빌딩(YMCA)으로 오셔서는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묻고 다녔습니다. ‘당신들 내 아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는 있소? 그들이 그 애를 고문하고 다리를 부러뜨렸답니다. 윤평희가 나에게 말해줬오.’”

아마도 윤평희의 활동들은 일본이 이승만을 투옥하기로 결정해놓고서 영구적인 그 처분을 내리기에 앞서 그것을 확실히 하는 것이었다. 잡아들이는 것은 단지 시간 문제였던 것이다. 1912년 선교사 친구의 도움으로 이승만은 6개월 동안 한국을 떠날 수 있는 허락을 얻었다. 그는 하와이를 향해 항해했다. 그곳에서 작은 한국인들 부락의 지도자로 정착했다.

[유교와 관]

한국에서는 사라지고 있지만, 이승만은 잊지 않고 있었다. 몇 년 후에 그는 “나는 유교 가정에서 났고 자연스럽게 평화의 사람이 되었습니다,”라고 썼다. 제 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이승만이 지닌 유교의 평화주의는 기독교에 의해 더 강화되었다. 그것은 비폭력 세상을 주창한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의 ‘이상주의적 비전’에 전적으로 부응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에게 있어서 한국에서의 ‘소극적 봉기’(비폭력 봉기)는 미국과 국제연맹으로 하여금 자신의 민족이 어떤 의식을 지녔는지 알게 하는 것이었다. 1919년 한국에 남아 있던 저항 지도자들은 이 봉기를 모의하기 위해 서울에서 비밀리에 만났다. 이 같은 이승만의 견해가 좌지우지 한 대한민국 독립 선언문과 그에 따른 다음 강령은 모든 마을에 배포되었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지,”

“일본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돌을 던지지 마십시오.”

“주먹으로 때리지 마십시오.”

“그것은 야만인들이 하는 행위입니다.”

1919년 3월 1일, 사람들은 독립 선언문 읽는 것을 들으려고 모였다. 그들의 금지된 태극기 깃발들, 그리고 “만세”를 외치는 소리로 물결을 이루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조용히 해산하고 집에 가 있기로 했다. 더 많은 장소에서 확산 시킬 수 있는 기회를 결코 갖지 않았다. 일본군은 군중들을 향해 가차 없이 쏘고, 칼을 휘두르고 소방관 갈고리로 그들의 희생자의 신체를 훼손했다. 일본의 ‘소탕작전’이 있던 그 피의 주간에 20만명의 한국인이 붙잡혀 들어갔고, 7천명이 죽었다.

이 ‘소극적 혁명’은 외국의 작은 동정을 이끌어내는 정도였다. 하지만 한국 애국자들의 투지를 강화시켰다. 1919년 말 한국의 독립 지도자들과 망명 중인 한국 공동체가 상하이에 모였다. 일본에 의해 이승만 목에는 현상금 30만 달러가 걸렸다. 이를 노리는 중국 공안에 잡힐 우려가 있던 그는 죽은 사람이 들어가는 한 관에 실려 상하이의 세관으로 밀입국했다. 그곳에서 그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을 돕는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컨퍼런스 & 크로케]

향후 20년간 이승만의 삶은 대개 망명한 정치인들이 겪는 좌절감에서 오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는 헛된 노력임에도 국제사회에서 한국에 대한 인정을 얻어내기 위해 국제회의에 참석했다. (미국 정부는 베르사이유 조약 회의와 군축회의에 참여하려는 그의 참석을 막았는데, 그 이유는 그의 존재가 일본인들을 당황하게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는 망명한 다른 한국 정치인들과 다투었다. (이승만은 지속적으로 수동적인 저항을 했고, 다른 지도자들은 폭력적인 행동을 선호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임시 정부란 존재하지를 않았고, 이승만은 중국에 있는 중앙 정치국을 한국의 정치적 암살자 김구에게 넘겨주었다.

1934년 이승만은 제네바 국제연맹 회의에 참석하는 동안에 만났던 오스트리아인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했다. 이승만보다 20세가 어렸다. 프란체스카는 매력적이고 쾌활했다. 그녀는 터무니없는 남편의 재정을 효율적으로 관리했다. 1941년 이승만은 이르기를 “내가 외국 여자와 결혼했을 때, 내 친지들은 매우 불유쾌해 했지만, 그러나 그들은 완벽한 결혼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파티에서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자, 이제 그만이요! 당신은 충분히 얘기했어요.”

1939년 이승만과 프란체스카는 워싱턴으로 이사했다. 이승만이 미국 내에서 임시 정부의 미국 대표 및 모든 한국인 활동가들의 결정권자로 일하던 곳이다. 합리적인 인상을 주는 시설을 구비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조언자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16번가의 치장용 벽토로 된 방 12개짜리 집을 샀다. 평범하게 살았으며, 서양 주류는 마시지 않던 이승만은 이따금씩 담배를 피운 것 말고는 워싱턴의 칵테일파티도 피했다. 대부분의 그의 일과는 한국의 독립과 임시 정부의 국무성에 관심을 쏟는 데 사용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이후에도 미국은 여전히 냉담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진주만 침공 이후 이승만이 미 국무부에 자신의 신원 증명을 우편으로 보냈을 때, 그는 그것들을 와서 도로 가져가라는 요청을 받아야만 했다.

그는 워싱턴에 살고 있는 동안 여가 시간의 대부분을 옥외에서 보냈다. 잔디 깎는 일을 매우 좋아했고 일요일 오후 포토맥(Potomac) 강에서 빌린 노 젓는 배를 타고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의 아내와 함께 하는 테니스 외에, 그의 유일한 활동적 스포츠가 있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이승만 정부의 주장을 너무나도 완고하게 무시한 코델 헐 전(前) 국무장관이 가장 좋아했던 ‘크로케’ 게임이었다(잔디 구장 위에서 나무망치로 나무 공을 치며 하는 구기 종목). 1944년 어느 날 오후, 이승만은 카이로 회담 컨퍼런스 방송을 들으려고 친구 몇 명과 하던 크로켓 게임을 중단했다. 그는 “한국 자유롭게 될 것이다”라고 약조하는 대목의 ‘공동성명’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적절한 때에”라는 교묘한 말을 들으며 그 약속은 손상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방송이 끝날 때 이승만은 주인에게 말했다. “내가 코델 헐과 크로켓을 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유감인지.”

미국의 무관심은 이승만의 성격까지 바꾸어 쓴맛과 환멸을 남겼다. 세계의 대부분이 자신의 대의에 적대적이라 확신하면서 그는 친구들과 조언자로 구성된 작은 동아리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 대표는 수년간 한국 정부의 대리인으로 활동해온 존 S. 스태거스(John W. Staggers) 변호사였다. 스태거스는 이승만의 수입을 관리했다. 이 수입은 미국에 있는 한인들의 기부금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기부금이 적을 때는 스태거스가 자기 주머니에서 그 모자란 것을 채워 넣었을 것이라 많은 워싱턴 사람들은 믿었다.

[비통함과 보이 스카우트]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서, 이승만에게 1919년 당시 자신에게 동기 부여를 주었던 평화주의자의 이상주의가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되었을 때, “고래들이 싸울 때는 새우가 먹힌다”(‘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친다’를 오인한 듯: 역자주)는 한국 속담의 쓰디쓴 이해를 절감했다. 미 국무장관을 우회하고서 그는 육군성(미 국방부가 조직되기 전의 미 군사기구)에 자신을 해방된 한국에서의 단지 “사적인 사람으로” 돌려 보내달라고 설득했다. 미국의 점령군을 지휘한 존 호지 장군은 이승만에게서 남한의 혼돈 가운데서 질서를 불러들일 수 있는 구심점, 곧 사람을 결집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 호지 장군이 서울의 한 연단으로 이승만을 인도했을 때는 5만 명의 한국인들이 그들의 전설적인 지도자의 눈앞에서 눈물과 환호를 터뜨렸다.

다음 몇 개월 동안 이승만은 호지 장군이 협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그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변화의 기폭제가 되어 주었다. 이승만 귀국 당시 205개의 한국 정당들이 미 군부에 등록되었다. 그 중에는 ‘절망적 희망 사회’, ‘한국 정치인 지지자 연맹‘, ‘임시 정부 귀환 준비위원회’, ‘한국 청소년 운동’ 등이 있다. 이들은 “새로운 보이 스카우트들”이라 불렸다. (“새로운 보이 스카우트들”은 이내 법률 및 명령의 위협으로 억제되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한국인이 정당을 경멸하고 있기 때문에, 이승만은 비록 국내 정당이 자신의 지침을 따르고 자신의 정책들을 지지하더라도, 어느 그룹과의 제휴도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2가지 견해를 강하게 주장했다. 1) 한국은 러시아와 미국의 간섭이 없는 독립국이어야한다. 2) 한국은 통일되어야 한다. 즉, 북한 공산주의자가 쫓겨나고 전국이 이승만과 연합해야 한다. 이승만의 이 실제적인 완고한 입장은 남한 사람들을 두 '당사자'로 나눴다. 하나는 호지 장군 및 미 국무부와 함께 이승만에 동의하는 사람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자들과 연합하는 자들.

곧 타협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승만의 이같은 합의로 미국과 유엔은 북한이 총선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북한의 공산당 지도자들은 이를 거부했다. 자유 선거의 결과를 두려워하고, 그들은 38선을 통행할 수없는 국경으로 바꿨다. 그리하여 경제적으로 한국의 반쪽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1948년에 남한은 마침내 북측을 제외하고 유엔 주최로 정직하고도 신중한 감독 하에 선거를 실시했다. (남북한의 상대적 인구를 근거로 하여, 국회의원 310석 중 100석을 비워두고 한국을 통일해야 한다면 북한 대표가 충원하도록 결정했다.) 선거에서 한국인들은 이승만을 지지했다. 대한민국이 설립되었고 이승만이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장작더미와 전쟁]

거의 그와 동시에 새 대통령이 곤경에 처했다. 35년간의 망명 생활이 그를 외국인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불평들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불이 지펴졌다. 그의 적대자들 중 일부는 그가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가 공공 장소에서만 한국 옷을 입고 집에서는 서양 옷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공략했다. 공보실의 청중들은 한국말에 서투르다는 이유로 이승만의 오스트리아인 부인의 존재에 짜증을 느꼈다. 한 좌익은 이르기를 "그가 우리 나라의 아버지 일지는 몰라도, 그러나 그녀는 결코 어머니가 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더 심각한 것은 이승만의 국회와의 문제였다. 이승만 정부의 일부 기획에 필요한 기금을 국회가 승인을 거부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제 80차 미 국회에서 트루만의 기분을 능가하는 활력으로 그들을 비난했다. 그런 다음 이승만은 위헌적으로 행정 명령에 의해 기금을 충당했다. “한 대통령과 그의 국민과의 사이에 왜 뭔가(국회)가 끼어들어 있어야 하는가?”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때때로 반역적인 국회의원들과 가진 회의에서, 분노가 커지면 이승만은 대통령 저택의 장작더미로 탈출을 한다. 장작들을 크기에 맞게 다듬고 난 후에야 일시적이나마 평정을 되찾았고 그러고 나면 이승만은 회의에 다시 돌아왔다.

일부 관측통들은 북한의 침략 전 몇 개월 동안 이승만 정부의 위신이 침체 돼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국회의 상당수가 이승만에게 적대적인 유전자들로 채워졌다는 지난 5월 유엔 총회에서 관측된 선거 결과를 인용했다. 이승만 정적들은 국내외에서 이승만을 레임 덕 대통령이라 불렀고 그의 정부가 불명예 스럽다고 선언한 바 있다. 다른 소식통들은 지난 6월 이승만 정부가 막 진전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는데, 공산주의자들이 공격한 것은 그들이 아시아에서 대중적인 반공 정부의 효과적인 모범을 용인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라 믿었다.

이승만 정부는 전쟁의 시험 아래 놀라운 힘을 보여 주었다. 이승만 내각의 상당수가 고위직 관료의 재능을 보여 주었는데, 그 중 뛰어난 것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상선에서 선장 경험이 있었던 신성모 국방장관이다. 그 엄청난 초기의 패배 직후, 대한민국 육군의 신속한 조직 개편을 주도한 것이 신성모였다. 또 다른 뛰어난 인물도 ‘신’씨 성이었다. 웅변에 능한 국회의원 신익희이다. 비록 이승만의 지지자는 아니지만 내각과 긴밀히 협력하여 국회를 전시 자산으로 삼았다.

남한 국민과 지도자들의 이같은 전시 행위는 이승만의 정책에 호의적으로 반영되었다. 소수의 이탈을 겪은 대한민국 육군은 아시아의 반 공산주의 군대에서 가장 결정적이고 효과적인 군대로 입증되었다. 그리고 모든 우려와는 달리 한국에서는 진정한 게릴라 활동이 거의 없었다. 북한의 비정규 군대에 의한 무수한 공격이 있었지만, 한국의 농민이나 유엔군을 공격하는 노동자의 사례는 거의 없었다.

이승만에게 북한의 침공은 자신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의 눈에는 전쟁으로 인해 그에 수많은 적을 양산비켰던 타협하지 않는 반공주의 입장이 정당화되었다. 그리고 전쟁은 한국을 통일할 기회를 제공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이 승리했을 때 북한이 남한에 의해 흡수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우리는 절망하지 않았다.” 최근 이승만이 말했다. “우리는 실망하지 않아야 한다!”

이승만은 55년 동안 “자신의 나라의 아버지”라는 직무에 뛰어 들었다. 지난 주, 늙고, 피곤하고, 괴팍하지만 아직도 확신에 찼고 여전히 한국 독립의 상징이었던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그 자리에 가까이에 있었다.

* “리”(Rhee)의 한국 이름은 Yi Sung-man(이승만)이다. 영어로 옮긴 “리”(Rhee)라는 한자 성씨는 중국어와 한국어로는 “이”(Yi)로, 일본어로는 “리”(Ri)라고 쓰인다. 다른 많은 한국인들처럼 이승만은 서양인과의 교류에서 편의상 그의 이름을 서구화했다.

* 김구는 1899년 일본인 대장을 목졸라 죽이면서 한국 대중들의 인기를 끌었다. 그 일본인 대장의 시신 곁에 김구는 자신의 이름과 주소, 살인 사유를 기록한 메모를 남겼다. (그 일본인 대장은 한국 여왕[‘민비’를 여왕으로 착각: 역자주] 살해를 지휘했다.) 당국은 김씨를 감옥에 잡아넣었지만, 1901년 그는 탈옥하여 불교 승려로 위장했다. 1917년 김구는 감옥의 위협속에서는 암살자로서 자신의 능률이 방해가 되기에 자신의 기지를 상하이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그곳에서 그는 일본 총독을 살해한 폭탄 테러 조직을 조직하고, 일본인 제독을 죽이고 마고루 시게미츠(Mamoru Shigemitsu) 외상의 다리도 날려버렸다. 마고루 시게미츠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주리 주에서 항복문서에 사인한 인물이다. 이로 인해 김구는 한국인의 영웅으로 부상했다.이 영웅은 일본 최초의 헌법상 수상자인 이토(Ito)를 암살한 또 다른 영웅 안중근의 딸과 결혼하여 결속을 다졌다. 1949년 이 한국의 테러리스트의 주모자 김구는 한국의 한 젊은 육군 장교에게 암살되었다. 그 젊은 장교의 친척 중 한 명을 살해한 것으로 의심되었기 때문이다.


(이 글의 번역자는 이영진박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