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의 샘터

언어유희의 대가가 나셨다.

이성수
2019-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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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자신의 폴리페서 행위를 앙가주망으로 오용하신 분께서 국민을 향해 다시 한번 용기있게 자신의 무모한 언어유희 솜씨를 사자성어로 펼쳐보였다.


그 깊은 의도는 똘똘한 국민들께서 알아 맞춰보란 의중일것이다. 그 분, 아니 나보다 키는 크지만 나이는 어리니까 그냥 그 자 라고 지칭하겠다. 그 자는  ‘서해맹산(誓海盟山)’이란 사자성어를 들고 나왔다. 이것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지은 시의 한 대목이다.


임금(선조)의 피난 소식을 듣고 왜적을 무찌르겠다는 결의를 담아 지은 이 시를 인용한 이유가 뭘까?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받은 자신의 결의를 충무공의 굳은 결의로 해석했다고 언론은 입을 모았다. 


‘앙가주망’도 그렇고 ‘서해맹산’도 그렇고, 그자가 벌이는 언어유희는 정말 국민을 개돼지 수준의 저능아로 보는게 아닌가 의심스럽다. 이와 같이 대중은 판단하기 힘든 기호화된 어휘를 통해 청자의 자발적 해석과 작용을 일으키는 문학적 행위를 보통 유비(類比)라 부른다.


서로 맞대어 비교를 불러일으키는 이 행위는 두 가지의 어떤 것이 몇몇 비슷한 근거로써 그 속성도 유사할 것이라는 유추(類推)를 일으키는 의도적 행위이다.


소시민에게 현실 정치를 일깨우려는 것인지, 자신의 지적우월성을 부각시켜 소시민들의 기를 죽이려고 하는건지, 이런 각인의 방식을 즐겨 쓰시니, 우리 소시민도 한 법학자의 수준에는 감히 미치지 못하지만, 그자가 현실 정치에 임하는 처신에서 보여지는 우려와 기대를 유비로  대꾸해 드리려 한다.

다음은 이영진박사의 글인용이다.


‘서해맹산’은 본래 “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가 그 행의 원문이다(진중음(陳中吟)의 3행).


“바다에 맹세하니 물고기/용이 감동하고 산에 다짐하니 초목이 알아듣는다”는 이 뜻은 대부분 임금의 피난 소식에 대한 결기와 연결짓지만, 보다시피 행의 본말은 물고기와 초목 외엔 자기 말을 듣는 자가 없는 철저한 자기 고립에 맺혀 있다.


이 진중음 시뿐 아니라 “한산섬 달 밝은…”으로 시작하는 한산도가(閑山島歌)도 그렇고, 충무공의 시는 다 비슷한 맥락이다.


이와 같은 자기 고립의 유비를 기독교 경전에 맞대어 비교하면, 두 사람을 꼽을 수 있다. 엘리야와 바울이다.


엘리야는 임금에 저항한 인물로 알려졌으나, 실은 아니다. 국가와 임금에 충성하다 철저하게 고립된 인물이다. 당시 이교도였던 이세벨왕비는 정통의 직언 예언자를 모조리 죽이는 바람에 엘리야 홀로 생존하였고, 엘리야는 엘리야대로 왕비가 길러온 바알 사제 400명을 모조리 사멸시킴으로써 더욱 철저한 고립을 맞이한다.


그런 점에서 엘리야 자신이나 엘리야가 휘두른 그의 검(劍)은 그자가 새기겠다고 한 서해맹산의 검과 일맥상통한 점이 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야훼가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찌어다”라며 다그친 것과, 그자가 “정치권·언론은, 한일(韓日) 중 어디에 동의하냐!”면서 자기를 따르지 않으면 마치 친일파라는 식으로 다그친 일은 서로 유비를 일으키는 까닭이다.


그런데 우리가 현대 사회에서 신화로 점철되기 십상인 이 같은 경전을 볼 때에도 모종의 사려 깊은 이해를 요하는 이유는, 그 인용 기호를 각 세대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사회가 지닌 미래를 앞당기기도 하고 좌절시키기도 하는 까닭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경전을 법전으로 보전해 온 신학에서조차 해석은 법에 선행하는 모종의 원형으로 간주하는데, 그것은 경전이 갖는 일차 텍스트보다도 그 텍스트를 해석한 해석자의 해석을 원형으로 존중하는 원리이다. 법학으로 말하면 일종의 판례가 갖는 권위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과거 엘리야의 검이 주도했던 야훼와 이교도 진영 사이의 이분법적 가름은, 바울의 시대에 와서 바울의 검에 의하여 이교도(이방)를 향한 기쁜 소식(Gospel)으로 전격 세대교체를 이뤄낸,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해석 행위를 통해 엘리야의 물리적 검은 바울에게 와서 본질을 꿰뚫는 로고스로서의 진정한 화염검이 되었고, 반면 여전히 종족주의(種族主義) 껍질을 벗지 못한 엘리야의 후예들은 일단의 원리주의자 신세를 면치 못 하게 된다.


헤브리이즘에서 헬레니즘을 관통하는 이 같은 법 수호의 근본 원리는 2천여 년 역사를 자랑하는데, 과연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충무공의 후예들이 휘두르는 서해맹산(誓海盟山) 검은 어떤 검인가.


여기에 우리의 기대감이 우려와 함께 깃드는데, 그 중심선상에 법학자이신 신임 법무장관 후보가 서 있다. 선출직 출마의 출정식을 연상케 하는 그의 임명직 기자회견에서 그자가 치켜든 서해맹산 검은, 지나친 문학적 유비로 비치는 까닭이다.


법을 문학적으로 전개하면 어찌 되는가.


해석학에는 ‘의역의 이단(the heresy of paraphrase)’이란 개념이 있다. 모종의 해석을 꾀하지만, 실상은 그것이 직역에 지나지 않는 까닭이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일본의 과거를 쥐고 있게 만들고, 그동안 일본은 우리의 미래를 쥐고 흔들게 만드는 함정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