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의 샘터

종교의 자유인가? 방역인가?

성수리
2021-01-18
조회수 430

 종교의 자유 vs 방역


 코로나19 팬데믹 발생에 따른 전세계 국가들의 조치는 나라마다 온도차가 있다. 마스크 착용여부 하나만 가지고 봐도  아무래도 전체주의적 국가들은 강압적인 방법에도 순응하는 편이고 

자유민주적 국가들에서는 거부와 저항이 만만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  우리나라 언론에서는 이런 현상을 다룰때 결과론적 시각으로 분석하는 듯하다. 강압적으로라도  방역하니까 확산방지에 효과가 있더라는 논리를 펴는 언론이 대부분이다. 이는 고스란히 국민정서에 영향을 주고 있다. 특히 특정집단에 대한 언론의 논리는 사뭇 적대적이다. 방역을 위해서는 강압즥인 방법을 쓰는게 옳다는 식의 주장을 펼친다.  그러면서 감염집단에 대해 차별적, 혐오적, 적대적 표현을 과도하게 사용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기독교에 대한 차별과 적대적 표현들은 도를 넘고 있다. 자유민주국가의 본거지인 유럽국가들의 확산현상을 보도할때도 당장이라도 전국민이 몽땅 감염되는게 아니냐는 식의 보도가 계속되면서 자유와 강압을 대조하는 논리를 펴고 있다. 결국 방역을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정도는 포기하는 것이 옳다는 식의 마타도어식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유럽현지의 분위기는 사뭇 아니다.  하루 수만명씩 감염자가 속출해도 두려움이나 공포분위기는 아니다. 최소한 우리가 국내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마녀사냥이나 차별, 혐오, 적대적 상황은 벌어지고 있지 않다. 조용히 각자의 자리에서 일하고 활동하며 주변에서 감염자가 나와도 차별이나 혐오현상은 벌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공포분위기를 조장하는 언론의 어떤 시도나 정치적으로 상황을 이용하려는 정치인들의 꼼수도 없다. 그냥 조용하고 덤덤하고 묵묵할 뿐이다. 


 얼마전 미국 연방대법원이 코로나19 방역보다 종교의 자유가 더 중요하다는 판결을 내놨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종교행사 참석자 수를 제한한 앤드루 쿠오모 뉴욕주지사의 행정명령이 부당하다며 가톨릭과 정통파 유대교 측이 제기한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연방대법원은 “감염병 사태에서도 헌법을 도외시하거나 잊어서는 안 된다”며 “예배 참석 규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 수정헌법 제1조를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순교의 피로 이뤄진 것이 종교의 자유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예배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의아스럽지만 신앙인에게 예배는 생활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이며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연의 문제이다 .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인 종교의 자유가 침해돼서도 안되고 침해당하는 상황이 벌어져도 안 된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는 종교의 자유, 예배의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당하고 있다. 금번 이 문제를 대하는 부산지법의 모습은 종교의 자유 따위는 국가권력과 정치논리 앞에서는 한낮 사치에 불과하다는 매우 굴절된 법정신의 결과로 보여진다. 아직도 한국은 자유국가에로의 갈길이 멀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문대통령은 지난 가을에 기독교지도자들과의 만남에서 방역수칙은 과학적이므로 잘 지켜주기 바란다고 했지만 현재 교회에 대한 방역지침은 과학적이지 않은 부분이

많다. 마스크착용,체온측정, 거리두기,명부작성, 소독을 실시하며 예배하는데도 20명 미만으로 규제하는것이  정말 과학적인가?  우리교회만 해도 2200명 들어가는 좌석에 20명만 들어가라는게 과학적 논리에 합당한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강단에서 회중석까지 거리가 10m나 되는데도 마스크를 쓰고 설교를 하라는게 과학적인가?  


식당이나 관공서는 확진자가 발생해도 소독하고 몇 시간 또는 하루나 이틀 뒤에 문을 연다. 밥을 먹기 위해 마스크를 벗어야 한다. 관공서 구내식당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유독 교회는 예배도 금지하고 종교소모임도 하지 못한다.심지어  확진자가 나오지 않아도 단지 예배를 드렸다든지 확진자가 다녀갔다는 이유로  폐쇄당하고 있는 현실은 자유민주주의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국가권력의 남용이며 국가 헌법을 스스로  부정하는 행위이다.


더우기 국가가 예배의 형식까지 관여하여 성가대를 세울 수 없게 한다든지 비대면 예배를 드리라든지 영상으로만 예배를 드리라고 행정조치 하는등 방역당국이나 지자체를 통해 예배 방식을 바꾸도록 강요하는 것은 종교의 자유의 본질적 내용을 훼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형평성 문제에서도 정부와 언론은 불교와 카톨릭에 비해 기독교에 차별적 조치를 했다.  또한 교회를 비대면으로 하하라고 하면서 클럽이나 대형 판매점은 왜 비대면으로 하지 않는가 ?  교회는 예배 숫자를 제한하는데, 백화점 하루 입장객 숫자는 왜 안 정하는가? 하루 7백만이 이용하는 지하철과 시내버스의 밀접접촉을 왜 통제하지 않는가? 대면보다 더 위험한 밀접접촉인데...


시골 두메산골의 작은 교회도 다 마스크 쓰고 거리두기한다. 작은 교회는 거리두기 안해도 자동거리두기가 된다. 100명 들어가는 예배당에 노인 몇분 나오는 것도 못나오게 규제하는 방역이 정말 과학적인가?

그 뿐이랴? 교회를 바이러스의 온상처럼 호도하고 사회적  책임과 바이러스의 심각성을 모르는 이기적인 집단처럼 보여지게 만든 것도 유감이다. 


 고난의 장기화는 필연적으로 정신건강 피폐와 심리적 불안정, 두려움으로 인한 심신 약화와 질병유발로 이어지는 바 지금은 그 어느때 보다도 예배를 통해 두려움을 몰아내고 심리적 안정을 취해야 할 때이다. 한국교회는 격변의 세월 속에서 국민의 정신건강을 지키는 일에 큰 역할을 해왔다.  예배금지로 인해 발생하는 정신적 문제들은 누가 책임 질 것인가?


자유국가는 전쟁중에도 종교의 자유를 제한하서 않았다. 그 이유는 신앙정신의 유익함 때문이다. 어느 국가든 기독교신앙을 적대시하는 나라를 빼놓고는 어떤 상황에서도 교회예배를 금지 시키거나 교회당을 강제로 폐쇄조치하지 않았다. 신앙이 주는 선한 영향력이 얼마나 큰 가치를 발휘하는가를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이해불가의 상황이다. 정부와 방역당국에서 일방적으로 예배중지 여부와 교회폐쇄 여부를  결정하여 "행정명령"한다. 이 문제는 각 교회나 교단에서 알아서 하도록 해야한다. 왜냐하면 전쟁의 끔찍함이나 전영병의 공포보다 더 무서운 것이 심리적 불안과 불행감과 삶과 죽음에 대한 본질적인 두려움이 사회 전반을 사로잡는 일이다. 이는 의학적방법이나 정치적 방법으로 해결할수 없고 오직 종교적 평안을 통해서만 해결가능하다.

그러므로 국가는 개인의 종교의 자유와 예배권을 제한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재난지원금 몇푼 집어 주는 것으로 해결되지 못하는 근본적인 평안은 수백억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국가라 할지라도 어떻게 모든 국민들에게 평안을 줄수 있겠는가?  정부는 그냥 정부의 일에 충실하면 된다. 종교를 정부가 통제하는 것은 월권이다. 종교는 어떤 상황에서도 묵묵히 자기 본연의 사명을 감당해왔으며 하고 있을 뿐이다. 

 어느 시골교회 할아버지 목사님 이야기로 끝을 맺고자 한다. 은퇴를 앞두고도 주일예배를 위해 봉고차를 손수 운즨하여 교인들을 모시고 다닌다. 80 안팎의 연로한 성도들 몇분을 태워다가 예배드리고 목이 메도록 설교하시고 늙은 사모가 손수 차린 밥을 함께 나눠먹고 집에 모셔다 드린다. 새벽에도 한둘 나오시는 성도들을 위해 봉고차를 운전한다. 수요기도회에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항상 그렇게 하신다. 그런데 코로나가 오면서 교회는 자동으로 문을 닫았다. 목사님 내외분만 예배드린다. 외지의 자식들이 부모님께 즨화로 성화를 부린단다. 교회가지 말라고..."그러니 목사님 차 안와도 돼요. 교회 못나가요." 기가 막힐 노릇이다 평생목회만 해왔는데 이런 일은 처음이다. 코로나 때문에 자식들이 교회가지 말라고 성화를 부리고 노인들은 자식들 걱정한다고 예배를 안오겠단다. 오늘도 텅빈 예배당을 늙은 목사부부만이 덩그러니 지키고 있다. 오지 않을 성도를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