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의 샘터

앙가주망? 오용의 실례

이성수
2019-08-05
조회수 54

조국교수의 "앙가주망" 사용에 대한 반론


고대 글로벌국가였던 헬라 시대에 유대인을 유다이오스(Ἰουδαῖος)라 불렀는데, 유다이오스란 말은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가 이룬 지파를 지역적 의미에서 라틴어로 ‘유대(Judea, Ιουδαία)’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


오랜 세월 나라 없이 여러 지역에 퍼져 명맥을 지탱할 때에 국가란 개념보다는 종족주의적 의미를 선호한 이유에서 이 이름으로 불리웠다.


그러나 왜 하필 넷째 아들의 이름이 나머지 모든 종족의 대표성을 소유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모호하다. 야곱의 맏아들 르우벤이 장자 지위를 박탈당해서라는 사유는 알려졌지만, 어찌하여 둘째, 셋째도 아닌 넷째 아들이 서열상 우선순위를 뛰어넘어 대표성을  승계하게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왕국의 통일을 이룬 군주, 다윗의 조상이었다는 귀납적 사유만이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성서는 그가 모든 종족의 대표가 된 중요한 인과적인 단서 한 장면을 남기고 있다.


한 아버지와 네 명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 종족의 시조들은 애증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 중 요셉은 아버지의 가장 큰 총애를 받았기에 형제들에게 가장 큰 미움도 받았다. 급기야는  모든 형들이 밀약해서 요셉을 이집트로 팔아먹었다.


그러나 요셉은 온갖 고초 끝에 총리가 되는 역전의 주인공이 되었고 애굽의 전권을 쥐고  있을 무렵, 형제들은 오랜 기근으로 굶주림에 허덕이다 먹을것을 구하기 위해 이집트에 입국하고 총리가 된 동생을 대면하게 된다. 하지만 요셉을 알아보지는 못한다.


이때 요셉은 우선 같은 배에서 난 친동생 베냐민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자기에게처럼 해코지하지 않았는지) 형들에게 첩자 누명을 씌운다. 그리하여 형들 중 한 명을 인질로 잡고서 막내동생을 데려와 첩자가 아님을 입증하라며 일행을 돌려보낸다.


아버지 야곱의 입장에서는 아들 하나를 또 잃게 생긴 것이다. 인질로 잡힌 시므온을 구하기 위해 막내 아들 베냐민을 보내자니 생사를 알 수 없는 요셉처럼 베냐민마저 잃을 것 같고, 안 보내자니 둘째 아들을 잃게 생겼고, 바로 이때 누구보다 강력하게 설득에 나선 인물이 다름 아닌 넷째 아들 유다이다. 유다는 여기서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 제가 그 아이(베냐민)의 안전을 책임지되, 제가 담보가 되겠습니다. 그 아이가 잘못되면 제가 죄를 다 받겠습니다. 책임지겠습니다.”


여기서 ‘담보’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라브(עָרַב)가 바로 앙가주망의 핵심 본령이라는 것을 소개하기 위하여 이렇게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니까 앙가주망이란 자신(또는 자신처럼 소중한 무엇인가)을 담보로 걸고서 위중한 일에 참여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 담보 행위는 유대/기독교의 교의를 아우르는 중요한 요체이기도 한데, 이른바 신약 시대에 와서 ‘하나님의 영’이란 하나님께서 ‘담보(ἀρραβών)’로 제공하는 영으로 소개된 까닭이다.


이 같은 앙가주망 명제에 실존주의라는 개념을 입혀 현대적 앙가주망의 표본이 되도록 파격적 제시를 한 인물은 아마도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일 것이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는 자기 선언에 맞추어 그야말로 ‘자기’에 대한 극단적 자유를 통해 존재 이유를 밝히려 한 사르트르에게 있어 앙가주망 최고의 실천은 아마도 저 유명한 ‘계약 결혼’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본래 앙가주망(engagement)이란 말은 결혼 서약(wadi-)에서 유래한 말 ‘가제(gager)’로 들어서는(en-) 모종의 약정을 의미했기에, 사전적 정명제로는 ‘약혼(engagement)’을 의미하였으나, 사르트르에게 앙가주망은 결혼이라는 서약을 두고서 남녀 각자가 자신의 자유를 위해 오히려 결혼을 저당잡힌 반(anti)명제였던 까닭이다.


결혼한 남녀가 서로에게 각자의 자유를 저당 잡힌 전통가치에 비해 납득할 수 없는 비윤리가 아닐 수 없지만, 자유를 위해 결혼을 담보물로 제공하였다는 점에서는 앙가주망 명제가 보전되는 원리이다.


다시 말하면 고대 정경(canon) 사회를 살면서 모든 유대인들의 시조가 되었던 유다에게나, 해체 사회를 꿈꿨던 사르트르에게나 책무로서의 앙가주망 원리는 바로 ‘담보’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조국 전 민정수석이 폴리페서(교수직을 내려놓지 않고 정치하는 사람)라는 비난에 직면하여, 자신의 (공직) 참여를 두고 “지식인과 학자의 도덕적 의무로서 앙가주망”이라 항변한 것은 어리둥절할 뿐 아니라, 전혀 앙가주망과는 관계가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무엇이 ‘담보’로 제공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쪽 사람들, 좌우지간 알아줘야한다. 자신의 지성을 담보로 사상적 지위를 누리기 위해 언어를 생성(엄밀하게 말하면 왜곡,굴절,끌어다 붙임)하는데 도통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것이 저능적 수준의 사람들에게는 오~대박! 하고 놀랍도록 유식하게 보이지만 실상은 오용의 실례일 뿐이다. 아님 변명하다 궁색하게 된 것이든지....


(이영진박사 글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