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의 날에 성도가 드려야 할 예배>
코로나19 재앙시국에 교회가 심각한 갈등상황에 봉착했다. 신사참배로 80년간 내흉을 겪어온 한국교회가 2020년을 기점으로 새로운 갈등국면을 맞이한 것이다. 일명 "예배중지"문제이다. 이는 우선 용어 사용부터 잘못된 프레임에 갇혀있다. 교회역사에서 예배중지란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다는 긧은 자명한 사실이다. 다만 유형교회 체제에서 예배를 위한 모임이 중지된 적은 있다. 그러므로 예배중지란 모임을 폐함으로 나타난 결과적 용어인 것이다. 따라서 예배중지가 아니라 "모임중지"로 용어를 바꿔야 한다. 물론 이 둘 사이의 의미 차이는 없다. 유형교회의 본질은 '예배를 위해 모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임은 곧 예배가 된다. 그럼에도 용어선택은 분명히 해야 한다. 예배당이 없는 예배도 있기 때문이다.
유형교회의 예배는 "모임"과 "의식" 두가지 요소가 필수불가결 요건이다. 이는 곧 예배자의 정신과 직결된다. "성령과 진리"의 예배정신, "오직 예루살렘"의 성전정신이 모임과 의식으로 증명되는 구조다. 하지만 예배당이 없는 예배는 자신이 곧 교회가 되는 구조이다. 이를 무형교회라고 하는데 예배당이 아니어도 어느곳에 있든지 내가 교회되는, 즉 하나님을 예배하는 정신을 기반으로 한다. 이를 우주적교회라고 칭하는 것은 모든 자연과 만물이 다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함에 있어 장소적, 시간적, 존재론적 제한을 받지 않음을 전제로 한다. 비록 유형교회로서 예배당 중심의 모임과 의식에 준하는 예배에 익숙한 성도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우주적교회의 예배가 생리에 맞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성경은 궁극적으로 이런 예배의 모습을 제시한다.
대표적으로 본다면 욥의 예배와 다니엘의 예배이다.
욥은 창세기와 동시대 혹은 이전 기록으로 보기도 한다. 당연히 예배당이 없다. 욥의 예배를 잘 드러내는 부분이 바로 1장에 등장한다. 동방의 의인, 최고 부자였던 욥에게 엄청난 재앙이 연쇄적으로 닥쳐왔다. 욥기가 초점을 둔 사실은 재앙의 경중여부가 아니라 재앙에 대한 욥의 반응에 있다.
재산 잃고 자녀 잃은 욥의 반응은 비명을 지르거나 졸도하거나 원망하거나...
...이런 반응이 아니라,
그야말로'기다렸다는 듯이' 특정행동이 먼저
튀어나온다.
무슨 행동인가?
한글성경으로는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라고 번역했는데
분석해보면 욥의 반응
행동이 3단으로 나타난다.
1) 일어난다.
2) 밀고, 찢는다.
3) 엎드려 경배한다.
히브리어로 경배는 봉사와 섬김의 뜻을 지닌 '아바드'란 말이 있으나 여기서 욥이 한 '경배'란 "샤카"(שָׁחָה)이다.
"샤카 예배"가 무엇일까?
핵심은 '일어남'과 '엎어짐'이다. 두 단어는 상호적이며 연쇄적이다. 앞쪽에 '일어났다'는 동사는 뒤의'엎어진 상태'를 위한 사전 행동이다. 엎드림이 그냥 엎어지는 것과는 다르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왜 이 문장이 3단 구조로 되었는지
알아야 한다.
그것은 경배를 위한 목적을 가지고 일어났다가 엎드린 것이다.
욥은 재앙의 소식을
곧바로 하나님을 향한 예배행동으로 반응한 것이다.
이는 욥의 절대믿음을 반증한다. 악(재앙)조차도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면 이를 수용한다는 뜻이다. 그 정신 자체로서 예배가 되는 것이다.
재앙이 닥쳐왔을때 우리가 보일 수 있는 태도는 두 가지이다.
1)앉은 상태에서 그대로 나자빠져서 일어나지 않는 것
2)일어났다가 엎드리는 것.
두번째만이 예배로 가는 길이다. 악조차도 수용하는 하나님 절대주권적 신앙이 진정한 예배라는 것이다.
다니엘은 “왕 이외의 어떤 존재에게 종교행위를 하면 사자 굴에 던져지는” 법앗이 통과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기도(예배)를 쉬지 않았다. 그는 30일 동안만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기도생활을 은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 하지 않았다. 도리어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단 6:10) 했다.
“전에 하던 대로” 기도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예배하다가 걸리면 사형당하는 상황에도 기도시간, 장소, 형태를 그대로 유지했고 은폐를 위해 어떠한 변경가감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예배 자체보다도 다니엘의 결단에 근거한 행동이다. 즉 전에 하던대로 예배한다 는 결단에 초점을 맞취야 한다.이는 예배가 사형,구속, 벌금, 압제,박탈,손해, 조롱이라는 수용하기 두려운 상항으로 이어질지라도 이 모든 것을 기꺼이 감수하고 예배하겠다는 불굴의 의지이다.
욥과 다니엘의 예배는 코로나 사태에서 작금의 교회가 예배를 폐지, 변형하는 태도와 비교가 된다.
상당수 한국교회는 예배당에서 드리던 공적예배중지를 선언하고,
인터넷 영상예배로 대체하고, 가정예배로 전환했다. 이는 결국 성도들의 예배권 박탈이라는 초유의 결과를 가져왔다. 무엇보다도 성경이 말씀하는 예배의 참된 정신을 묵살해버리는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 주고 말았다.
물론 예배당이 아니어도 진정한 예배를 드릴수 있다. 욥과 다니엘처럼... 또 초대교회처럼...그러나 그들의 예배는 극한 재앙속에서도, 죽음을 불사하고 드린 예배이다. 오늘날 우리가 편안한 가정에서, 따뜻하고 쾌적한 아파트에서, 리모콘을 조작하여 손싑게 설교채널 찾아서 드리는 가정 예배와는 비교할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결국 영상예배가 필요에 따라 대안 예배가 될 수 있다는 논리를 펴는 목회자들과 학자들에게 오류의 문을 열어준 것이며, 국가적 위기와 재앙이 닥쳐오면 국가의 법안이나 요청에 따라 또다시 예배중지,폐지를 반복할 수 있는 타협적인 길을 열어주는 기회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목회자 없이 영상으로만 예배하고 파하는 인터넷예배와, 교회 출석을 거부하는 가나안 교인들의 편리적 신앙행태에 합리화의 길을 열어주게 된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것은 현장예배도 불경건하게 하는 교인들이 수두룩한 현실에서 인터넷으로 경건한 예배가 될까 의문스럽고, 자칫 초신자나 다음세대들에게 예배에 최고의 가치를 두지 못하도록 할까 두렵다.
지금 우리가 하는 영상예배는 설교를 듣다가 중간에 듣기 싫으면 안 들을 수도 있다. 가족들과 얘기를 나누며 산만한 예배가 될 수 있다. 편안한 복장과 편한 자세로 예배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것은 예배당에서도 얼마든지 벌어지는 일이다. 욥이나 다니엘같은 정신만 있다면 장소가 무슨 문제일까마는 우리의 현실은 이에서 멀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우리가 드릴 최선의 예배는 욥과 다니엘처럼 그 마음과 행위의 경건성과 절대성이 하나님 앞에 최선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나마 이 땅에서 이에 가장 가까운 것은 바로 예배당 에서의 "모임"과 "의식"을 동반한 예배인 것임을 부정하기 힘들다.
나에게는 욥과 다니엘의 예배정신이 있는가?
이 정신이 분명하다면 나는 예배자다.

<재앙의 날에 성도가 드려야 할 예배>
코로나19 재앙시국에 교회가 심각한 갈등상황에 봉착했다. 신사참배로 80년간 내흉을 겪어온 한국교회가 2020년을 기점으로 새로운 갈등국면을 맞이한 것이다. 일명 "예배중지"문제이다. 이는 우선 용어 사용부터 잘못된 프레임에 갇혀있다. 교회역사에서 예배중지란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다는 긧은 자명한 사실이다. 다만 유형교회 체제에서 예배를 위한 모임이 중지된 적은 있다. 그러므로 예배중지란 모임을 폐함으로 나타난 결과적 용어인 것이다. 따라서 예배중지가 아니라 "모임중지"로 용어를 바꿔야 한다. 물론 이 둘 사이의 의미 차이는 없다. 유형교회의 본질은 '예배를 위해 모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임은 곧 예배가 된다. 그럼에도 용어선택은 분명히 해야 한다. 예배당이 없는 예배도 있기 때문이다.
유형교회의 예배는 "모임"과 "의식" 두가지 요소가 필수불가결 요건이다. 이는 곧 예배자의 정신과 직결된다. "성령과 진리"의 예배정신, "오직 예루살렘"의 성전정신이 모임과 의식으로 증명되는 구조다. 하지만 예배당이 없는 예배는 자신이 곧 교회가 되는 구조이다. 이를 무형교회라고 하는데 예배당이 아니어도 어느곳에 있든지 내가 교회되는, 즉 하나님을 예배하는 정신을 기반으로 한다. 이를 우주적교회라고 칭하는 것은 모든 자연과 만물이 다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함에 있어 장소적, 시간적, 존재론적 제한을 받지 않음을 전제로 한다. 비록 유형교회로서 예배당 중심의 모임과 의식에 준하는 예배에 익숙한 성도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우주적교회의 예배가 생리에 맞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성경은 궁극적으로 이런 예배의 모습을 제시한다.
대표적으로 본다면 욥의 예배와 다니엘의 예배이다.
욥은 창세기와 동시대 혹은 이전 기록으로 보기도 한다. 당연히 예배당이 없다. 욥의 예배를 잘 드러내는 부분이 바로 1장에 등장한다. 동방의 의인, 최고 부자였던 욥에게 엄청난 재앙이 연쇄적으로 닥쳐왔다. 욥기가 초점을 둔 사실은 재앙의 경중여부가 아니라 재앙에 대한 욥의 반응에 있다.
재산 잃고 자녀 잃은 욥의 반응은 비명을 지르거나 졸도하거나 원망하거나...
...이런 반응이 아니라,
그야말로'기다렸다는 듯이' 특정행동이 먼저
튀어나온다.
무슨 행동인가?
한글성경으로는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라고 번역했는데
분석해보면 욥의 반응
행동이 3단으로 나타난다.
1) 일어난다.
2) 밀고, 찢는다.
3) 엎드려 경배한다.
히브리어로 경배는 봉사와 섬김의 뜻을 지닌 '아바드'란 말이 있으나 여기서 욥이 한 '경배'란 "샤카"(שָׁחָה)이다.
"샤카 예배"가 무엇일까?
핵심은 '일어남'과 '엎어짐'이다. 두 단어는 상호적이며 연쇄적이다. 앞쪽에 '일어났다'는 동사는 뒤의'엎어진 상태'를 위한 사전 행동이다. 엎드림이 그냥 엎어지는 것과는 다르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왜 이 문장이 3단 구조로 되었는지
알아야 한다.
그것은 경배를 위한 목적을 가지고 일어났다가 엎드린 것이다.
욥은 재앙의 소식을
곧바로 하나님을 향한 예배행동으로 반응한 것이다.
이는 욥의 절대믿음을 반증한다. 악(재앙)조차도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면 이를 수용한다는 뜻이다. 그 정신 자체로서 예배가 되는 것이다.
재앙이 닥쳐왔을때 우리가 보일 수 있는 태도는 두 가지이다.
1)앉은 상태에서 그대로 나자빠져서 일어나지 않는 것
2)일어났다가 엎드리는 것.
두번째만이 예배로 가는 길이다. 악조차도 수용하는 하나님 절대주권적 신앙이 진정한 예배라는 것이다.
다니엘은 “왕 이외의 어떤 존재에게 종교행위를 하면 사자 굴에 던져지는” 법앗이 통과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기도(예배)를 쉬지 않았다. 그는 30일 동안만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기도생활을 은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 하지 않았다. 도리어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단 6:10) 했다.
“전에 하던 대로” 기도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예배하다가 걸리면 사형당하는 상황에도 기도시간, 장소, 형태를 그대로 유지했고 은폐를 위해 어떠한 변경가감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예배 자체보다도 다니엘의 결단에 근거한 행동이다. 즉 전에 하던대로 예배한다 는 결단에 초점을 맞취야 한다.이는 예배가 사형,구속, 벌금, 압제,박탈,손해, 조롱이라는 수용하기 두려운 상항으로 이어질지라도 이 모든 것을 기꺼이 감수하고 예배하겠다는 불굴의 의지이다.
욥과 다니엘의 예배는 코로나 사태에서 작금의 교회가 예배를 폐지, 변형하는 태도와 비교가 된다.
상당수 한국교회는 예배당에서 드리던 공적예배중지를 선언하고,
인터넷 영상예배로 대체하고, 가정예배로 전환했다. 이는 결국 성도들의 예배권 박탈이라는 초유의 결과를 가져왔다. 무엇보다도 성경이 말씀하는 예배의 참된 정신을 묵살해버리는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 주고 말았다.
물론 예배당이 아니어도 진정한 예배를 드릴수 있다. 욥과 다니엘처럼... 또 초대교회처럼...그러나 그들의 예배는 극한 재앙속에서도, 죽음을 불사하고 드린 예배이다. 오늘날 우리가 편안한 가정에서, 따뜻하고 쾌적한 아파트에서, 리모콘을 조작하여 손싑게 설교채널 찾아서 드리는 가정 예배와는 비교할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결국 영상예배가 필요에 따라 대안 예배가 될 수 있다는 논리를 펴는 목회자들과 학자들에게 오류의 문을 열어준 것이며, 국가적 위기와 재앙이 닥쳐오면 국가의 법안이나 요청에 따라 또다시 예배중지,폐지를 반복할 수 있는 타협적인 길을 열어주는 기회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목회자 없이 영상으로만 예배하고 파하는 인터넷예배와, 교회 출석을 거부하는 가나안 교인들의 편리적 신앙행태에 합리화의 길을 열어주게 된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것은 현장예배도 불경건하게 하는 교인들이 수두룩한 현실에서 인터넷으로 경건한 예배가 될까 의문스럽고, 자칫 초신자나 다음세대들에게 예배에 최고의 가치를 두지 못하도록 할까 두렵다.
지금 우리가 하는 영상예배는 설교를 듣다가 중간에 듣기 싫으면 안 들을 수도 있다. 가족들과 얘기를 나누며 산만한 예배가 될 수 있다. 편안한 복장과 편한 자세로 예배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것은 예배당에서도 얼마든지 벌어지는 일이다. 욥이나 다니엘같은 정신만 있다면 장소가 무슨 문제일까마는 우리의 현실은 이에서 멀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우리가 드릴 최선의 예배는 욥과 다니엘처럼 그 마음과 행위의 경건성과 절대성이 하나님 앞에 최선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나마 이 땅에서 이에 가장 가까운 것은 바로 예배당 에서의 "모임"과 "의식"을 동반한 예배인 것임을 부정하기 힘들다.
나에게는 욥과 다니엘의 예배정신이 있는가?
이 정신이 분명하다면 나는 예배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