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는 살아생전 ‘바울’을 두 차례 그렸다. 하나는 늙은 바울을, 다른 하나는 젊은 바울을. 각각 1627년과 1657년에 그렸다. 젊은 바울이 후기의 작품이다. 렘브란트는 어찌하여 후기에 젊은 바울을 그렸을까?
전작인 노쇠한 바울은 머리칼도 헝클어져 있고 한쪽 신발도 벗겨져 있어 동공 풀린 시선이 말해주듯 감옥에 갇힌 말년의 신세를 그대로 보여준다. 하지만 후기작 속의 젊은 바울보다 오히려 바울답고 후기작보다도 힘에 넘친다. 창문에서 들어온 빛이 그의 뇌리를 빛나게 하기 때문일까. 이에 비해 후기작 속의 젊은 바울은 바울이라기보다는 이야기가 고갈되어 머리를 쥐어짜는 단지 문필가와도 같은 모습이다. 차라리 톨스토이에 더 가깝다고나 할까. 게다가 책상과 벽 사이에 꽂힌 장검은 감옥 속에 갇힌 바울의 장검이 바로 들어 휘두를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던 것과 달리 장검인지도 한참 만에 발견할 수 있다. 장검을 상징화 속에 가둬버린 이 젊은 바울은 렘브란트의 달라진 환경을 반영한다. 후기의 삶이 전기보다 어려웠던 것으로 알려진 렘브란트가 경제적으로 쪼들린 이유는 물질을 탕진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신이 그린 그림을 직접 경매에 부칠 수 있었던 과거와는 달리 이 젊은 바울을 그릴 때쯤은 그림 매매상 길드(guild)들이 마음 대로 가격을 정하였다. 그러다보니 작품은 더 생산적이어야 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그려진 이 젊은 바울은 렘브란트의 순수 작품이라기보다는 도제들의 생산적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 바울을 톨스토이처럼 만들어 놓은 것은 그 시대가 수요가 요구한 탓일 것이다. 그런 수요와 생산성이 감옥 속 노쇠한 바울의 왼손에 꽂힌 펜대를 젊은 바울의 오른손으로 옮겨 놓았을 것이다.
반면, 전기에 그린 저 노쇠한 바울을 그린 시점은 렘브란트로서는 처음으로 제자를 받을 수 있는 전성기의 출발 시기였는데 가히 21세기의 구도와 표정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매우 지쳐보지만 빛이 서려 있는 렘브란트 실제의 젊음을 반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울의 왼손의 펜대는 그가 왼손잡이라서가 아니라, 생각에 잠긴 그의 우측 손이 언제라도 우측으로 뻗어 칼을 잡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후기의 도제들에게는 이런 이해가 없었던 것 같다.
이제 명계의 입구에 한층 다가선 우리 시대에 우리가 그려낼 수 있는 바울은 어떤 표정일까. 렘브란트의 진품 속 바울도 젊었지만 바울은 실제로 죽는 순간까지 그 영이 젊음을 유지하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대를 저 장검으로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렘브란트는 살아생전 ‘바울’을 두 차례 그렸다. 하나는 늙은 바울을, 다른 하나는 젊은 바울을. 각각 1627년과 1657년에 그렸다. 젊은 바울이 후기의 작품이다. 렘브란트는 어찌하여 후기에 젊은 바울을 그렸을까?
전작인 노쇠한 바울은 머리칼도 헝클어져 있고 한쪽 신발도 벗겨져 있어 동공 풀린 시선이 말해주듯 감옥에 갇힌 말년의 신세를 그대로 보여준다. 하지만 후기작 속의 젊은 바울보다 오히려 바울답고 후기작보다도 힘에 넘친다. 창문에서 들어온 빛이 그의 뇌리를 빛나게 하기 때문일까. 이에 비해 후기작 속의 젊은 바울은 바울이라기보다는 이야기가 고갈되어 머리를 쥐어짜는 단지 문필가와도 같은 모습이다. 차라리 톨스토이에 더 가깝다고나 할까. 게다가 책상과 벽 사이에 꽂힌 장검은 감옥 속에 갇힌 바울의 장검이 바로 들어 휘두를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던 것과 달리 장검인지도 한참 만에 발견할 수 있다. 장검을 상징화 속에 가둬버린 이 젊은 바울은 렘브란트의 달라진 환경을 반영한다. 후기의 삶이 전기보다 어려웠던 것으로 알려진 렘브란트가 경제적으로 쪼들린 이유는 물질을 탕진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신이 그린 그림을 직접 경매에 부칠 수 있었던 과거와는 달리 이 젊은 바울을 그릴 때쯤은 그림 매매상 길드(guild)들이 마음 대로 가격을 정하였다. 그러다보니 작품은 더 생산적이어야 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그려진 이 젊은 바울은 렘브란트의 순수 작품이라기보다는 도제들의 생산적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 바울을 톨스토이처럼 만들어 놓은 것은 그 시대가 수요가 요구한 탓일 것이다. 그런 수요와 생산성이 감옥 속 노쇠한 바울의 왼손에 꽂힌 펜대를 젊은 바울의 오른손으로 옮겨 놓았을 것이다.
반면, 전기에 그린 저 노쇠한 바울을 그린 시점은 렘브란트로서는 처음으로 제자를 받을 수 있는 전성기의 출발 시기였는데 가히 21세기의 구도와 표정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매우 지쳐보지만 빛이 서려 있는 렘브란트 실제의 젊음을 반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울의 왼손의 펜대는 그가 왼손잡이라서가 아니라, 생각에 잠긴 그의 우측 손이 언제라도 우측으로 뻗어 칼을 잡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후기의 도제들에게는 이런 이해가 없었던 것 같다.
이제 명계의 입구에 한층 다가선 우리 시대에 우리가 그려낼 수 있는 바울은 어떤 표정일까. 렘브란트의 진품 속 바울도 젊었지만 바울은 실제로 죽는 순간까지 그 영이 젊음을 유지하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대를 저 장검으로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