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우리나라 안에서 벌어지는 가치관 전쟁, 문화전쟁, 입법전쟁의 양상은 68혁명으로 세계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신사회주의(네오 막시즘)가 한국의 주사파와 손을 잡으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해석된다. 이것의 특징은 전통적 도덕관이나 종교적 윤리관을 파괴한다는데 있다. 그 세력이 내세우는 태제는 매우 선동적이고 자극적이다. 그리고 자유와 평화, 인권과 평등을 그들의 사상적 기반으로 재해석, 재배치한다. 결국 인류의 고정적, 불변적 가치관을 뛰어넘는, 그러면서도 인간 내면에 숨어있는 자기쾌락의 악마성을 깨우는 성적 자유를 전면에 포진시키고, 인류의 근원적 욕망인 맘몬의 가치를 저변에 카펫으로 깔아놓고 활동한다. 한마디로 신사회주의는 사타니즘이다. 그 증거는 그들이 교회를 주적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과 교회파괴를 위해 법적, 교리적,신학적 갈등을 일으키는 가짜들을 앞잡이로 고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백주 대낮에 인민재판과 즉결처형을 단행한다는 것이다. 사법과 언론의 단두대는 그 충실한 도구이며 적폐몰이와 불법화는 가장 효과적이고도 패배할수 없는 게임의 마스터 키이다.
여기 영화 한편을 소개해본다. 우리의 반쪽이 이미 겪었고 남은 반쪽도 동일한 신세가 될 수 있다는 암울한 우리의 미래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영화다. 그 출발은 세계관을 잡아먹는 세계관의 출현이다.
이 영화의 무대는 아프가니스탄이다. 1973년 군주제가 폐지되고 이어진 소련의 침공과 철수, 그리고 탈레반 정권이 들어서기까지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
영화 <연을 쫓는 아이>의 주인공 아미르는 군주제가 폐지되기 10년 전 아프가니스탄의 부유한 집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직후 어머니를 여읜 아미르는 종의 아들인 하산과 형제처럼 자란다. 언청이인 하산은 아미르가 아무리 놀려도 화내지 않는다. 그렇게 친구요 형제처럼 지내지만 하산은 분명한 아미르의 종이다. 실제 하산은 어리면서도 충직한 종의 임무를 다한다. 아미르가 동네 아이들과 시비가 붙어 곤경에 처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목숨을 걸고 아미르를 위해 싸운다. 그러면서도 아미르는 아버지가 하산을 자신과 똑같이 사랑하고 아껴 주는 것이 언제나 샘난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연례행사로 열리는 연날리기 대회에서 우승한 아미르는 날아간 연을 하산에게 가져오도록 시킨다. 돌아올 시간이 지나자 아미르는 하산을 찾아 나섰다가 그만, 자기를 괴롭혔던 불량배들이 하산을 무참하게 성폭행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하지만 아미르는 하산이 자기를 구해줬던 것처럼 나서서 구할 용기가 없다. 집으로 도망쳐 왔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아미르는 착한 하산에게 도둑 누명을 씌워 하산과 그의 아버지 알리를 집에서 쫓겨나게 만든다.
그 일이 있은 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부르주아지였던 아미르 가정은 피신을 가야만 했다. 미국으로 건너가 적응할 무렵 아버지는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친구 칸 아저씨에게서 아미르는 놀라운 사실을 듣는다. 첫째, 하산이 탈레반에게 살해되었다는 사실. 둘째, 하산이 다름 아닌 아미르의 이복동생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 그의 아들 소랍이 아프가니스탄에 살아있다는 사실.
1973년 마지막 국왕 ‘자히르 샤’가 해외 순방길에 있는 동안 ‘다우드 칸’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첫 대통령이 된 것은 아프카니스탄 군주제의 종식이자 공화국의 출발이다. 그러나 이때 찾아온 것은 공화정이 아니라 공산주의 망령들이었다. 5년 뒤인 1978년 4월 공산혁명이 불어 닥치고 인민민주당(PDPA)이 실권을 거머쥐고 곧바로 이듬해 러시아의 침공으로 이어지면서 비극의 서막이 오른다. 부모, 자식, 친구, 동료, 이웃도 믿지 못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아랍어로 ‘동무’를 ‘라피크’라 불렀는데 이 라피크가 부모까지 감시하라고 가르치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소련 공산군이 약 20여 년간 주둔하다 남기고 간 것은 여러 종파 및 정파로 대변되는 무장세력 간의 유혈 투쟁이었다. 그러다 1996년 탈레반이 권력을 쥐고서는 하자라족을 대량 학살한다. 바로 하산이 하자라족이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충실한 자기 종의 아내를 범해 낳은 이복동생 하산의 소생을 구하고자 목숨걸고 고향에 당도했을 때 아미르 자신을 한 눈에 알아본 사람은 다름 아닌 하산을 성폭행했던 불량배 아세프였다. 그는 어엿한 탈레반 전사로 변모해 있었다. 그는 하산의 아들 소랍을 인신매매로 데려다 성노예로 부리고 있었다. 소랍의 아버지에게 했던 것처럼. 아미르가 하산의 아들 소랍을 데려가겠다고 나섰을 때 불량배 아세프는 놀랍게도 이런 강변을 늘어놓는다.
“...네가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뭘 알아?
공산주의자들이 사원을 파괴할 때 넌 없었어.
이 나라는 쓰레기 천국 같았어. 우리가 쓰레기를 치우고 법과 정의를 가져왔어...”
그러자 아미르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의 법과 정의는 이미 목격했어.”
아미르가 이미 목격했다는 정의는 무엇일까. 아미르가 소랍을 구하러 아프가니스탄으로 잠입해 들어와 목격한 정의는 한 운동장에서 축구 경기를 하다말고 하프타임에 법을 집행하는 장면이었다. 운동장 한 가운데 여성 하나를 트럭에 태우고 등장한 탈레반들은 축구 경기를 관람하던 관중들 앞에서 그 여성을 세워놓고 이렇게 외친다.
“형제여, 자매여!
우린 오늘 샤리아(이슬람 율법)를
지키려고 왔습니다.
정의를 지키려고 왔습니다.
신의 말씀을 따르려고 합니다.
신의 말씀이 뭡니까?
죄인은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합니다.
내 말도 아니고
형제의 말도 아닙니다.
신의 말씀입니다!
간음자에게 무슨 처벌을 합니까?
결혼의 신성함을 더럽힌 자들을 어떻게 처벌합니까?
신에게 불복종한 저들을 어떻게 다룹니까?
신의 창문에 돌을 던진 자들에게
어떤 대답을 주겠습니까?
돌을 돌려줘야 합니다!”
그러고서는 아세프가 먼저 돌을 들어 여성의 머리를 후려치자, 나머지 탈레반들이 여성에게 돌을 던져 처형한다. 이슬람의 율법 샤리아를 집행하는 이 모습은 이슬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공산주의 세계 속에서 자행되었던 인민재판을 방불케 한다. 하지만 샤리아를 집행하는 그들 자신은 그것이 샤리아인 줄로만 알고 있다. 이것이 이들에게는 ‘법과 정의’였던 것이다.
또한 이것이 바로 한 세계관이 다른 세계관에게 좀 먹히는 방식이기도 하다.
지금 대한민국의 교회가 겪는 문제는 바로 기독교의 이름으로 목사 딱지를 붙이고 있는 아세프같은 네오막시스트들이다. 그들은 신의 이름으로 동족에게 돌을 던지고 죽도록 선동한다. 그들은 그것이 사타니즘인지도 모르고 있다. 하지만 신명기 법전을 보라! 이들의 선동과는 달리 확실한 증인이 ‘먼저’(רִאשׁוֹן) 돌을 들게 함으로써 그 법률이 공산주의식 샤리아 인민재판화 되는 것을 막고(신 13:9), 동시에 자비와 관용의 세계관을 요청하고 있다. 이미 모세의 시대로부터. (그럼에도 이들은 간음에 관한 그 모든 증언이 허위로 드러났음에도 자신들이 누구보다 ‘먼저’ 돌을 들었던 사실에 대한 일말의 뉘우침도 없다.)
지금 대한민국의 상황은 무엇인가? 주사파는 공산독재정권을 끌어들이려고 할 것이다. 네오막시스트들은 성혁명과 맘모니즘으로 자신들이 꿈꾸는 사회를 만들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두 세력은 기존의 세계(보수)를 무너뜨리는데 손을 잡았다. 일차적 목적은 같았지만 그들의 최종목적은 다르다. 그들 안에서 세계관의 충돌현상이 심화될 것이다. 그 와중에 국민들은 무지와 혼돈의 어둠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네오막시즘에 열광하는 이들은 사태에 눈을 뜨지 못한다. 대형교회들와 영향력있는 목사들은 종교화의 길로 걸어간다. 가짜들은 카펫을 깔기에 여념이 없다. 재벌들은 활로를 찾아 떠나갈 것이다. 적폐놀음과 사법농단은 이 나라가 망할때까지 기승을 부릴 것이다. 완장효과를 똑똑히 목격하는 거다.
이 영화에서는 아미르가 노예이자 이복동생인 하산의 후손을 목숨걸고 구해 모든 기울어진 사태를 회복하려는 노력 속에서 그의 무너진 세계는 복원되고 있다. 이것이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하는 "희망"이다. 이 땅의 '아미르' 들이 일어나기를~
여기 영화 한편을 소개해본다. 우리의 반쪽이 이미 겪었고 남은 반쪽도 동일한 신세가 될 수 있다는 암울한 우리의 미래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영화다. 그 출발은 세계관을 잡아먹는 세계관의 출현이다.
이 영화의 무대는 아프가니스탄이다. 1973년 군주제가 폐지되고 이어진 소련의 침공과 철수, 그리고 탈레반 정권이 들어서기까지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
영화 <연을 쫓는 아이>의 주인공 아미르는 군주제가 폐지되기 10년 전 아프가니스탄의 부유한 집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직후 어머니를 여읜 아미르는 종의 아들인 하산과 형제처럼 자란다. 언청이인 하산은 아미르가 아무리 놀려도 화내지 않는다. 그렇게 친구요 형제처럼 지내지만 하산은 분명한 아미르의 종이다. 실제 하산은 어리면서도 충직한 종의 임무를 다한다. 아미르가 동네 아이들과 시비가 붙어 곤경에 처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목숨을 걸고 아미르를 위해 싸운다. 그러면서도 아미르는 아버지가 하산을 자신과 똑같이 사랑하고 아껴 주는 것이 언제나 샘난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연례행사로 열리는 연날리기 대회에서 우승한 아미르는 날아간 연을 하산에게 가져오도록 시킨다. 돌아올 시간이 지나자 아미르는 하산을 찾아 나섰다가 그만, 자기를 괴롭혔던 불량배들이 하산을 무참하게 성폭행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하지만 아미르는 하산이 자기를 구해줬던 것처럼 나서서 구할 용기가 없다. 집으로 도망쳐 왔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아미르는 착한 하산에게 도둑 누명을 씌워 하산과 그의 아버지 알리를 집에서 쫓겨나게 만든다.
그 일이 있은 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부르주아지였던 아미르 가정은 피신을 가야만 했다. 미국으로 건너가 적응할 무렵 아버지는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친구 칸 아저씨에게서 아미르는 놀라운 사실을 듣는다. 첫째, 하산이 탈레반에게 살해되었다는 사실. 둘째, 하산이 다름 아닌 아미르의 이복동생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 그의 아들 소랍이 아프가니스탄에 살아있다는 사실.
1973년 마지막 국왕 ‘자히르 샤’가 해외 순방길에 있는 동안 ‘다우드 칸’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첫 대통령이 된 것은 아프카니스탄 군주제의 종식이자 공화국의 출발이다. 그러나 이때 찾아온 것은 공화정이 아니라 공산주의 망령들이었다. 5년 뒤인 1978년 4월 공산혁명이 불어 닥치고 인민민주당(PDPA)이 실권을 거머쥐고 곧바로 이듬해 러시아의 침공으로 이어지면서 비극의 서막이 오른다. 부모, 자식, 친구, 동료, 이웃도 믿지 못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아랍어로 ‘동무’를 ‘라피크’라 불렀는데 이 라피크가 부모까지 감시하라고 가르치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소련 공산군이 약 20여 년간 주둔하다 남기고 간 것은 여러 종파 및 정파로 대변되는 무장세력 간의 유혈 투쟁이었다. 그러다 1996년 탈레반이 권력을 쥐고서는 하자라족을 대량 학살한다. 바로 하산이 하자라족이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충실한 자기 종의 아내를 범해 낳은 이복동생 하산의 소생을 구하고자 목숨걸고 고향에 당도했을 때 아미르 자신을 한 눈에 알아본 사람은 다름 아닌 하산을 성폭행했던 불량배 아세프였다. 그는 어엿한 탈레반 전사로 변모해 있었다. 그는 하산의 아들 소랍을 인신매매로 데려다 성노예로 부리고 있었다. 소랍의 아버지에게 했던 것처럼. 아미르가 하산의 아들 소랍을 데려가겠다고 나섰을 때 불량배 아세프는 놀랍게도 이런 강변을 늘어놓는다.
“...네가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뭘 알아?
공산주의자들이 사원을 파괴할 때 넌 없었어.
이 나라는 쓰레기 천국 같았어. 우리가 쓰레기를 치우고 법과 정의를 가져왔어...”
그러자 아미르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의 법과 정의는 이미 목격했어.”
아미르가 이미 목격했다는 정의는 무엇일까. 아미르가 소랍을 구하러 아프가니스탄으로 잠입해 들어와 목격한 정의는 한 운동장에서 축구 경기를 하다말고 하프타임에 법을 집행하는 장면이었다. 운동장 한 가운데 여성 하나를 트럭에 태우고 등장한 탈레반들은 축구 경기를 관람하던 관중들 앞에서 그 여성을 세워놓고 이렇게 외친다.
“형제여, 자매여!
우린 오늘 샤리아(이슬람 율법)를
지키려고 왔습니다.
정의를 지키려고 왔습니다.
신의 말씀을 따르려고 합니다.
신의 말씀이 뭡니까?
죄인은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합니다.
내 말도 아니고
형제의 말도 아닙니다.
신의 말씀입니다!
간음자에게 무슨 처벌을 합니까?
결혼의 신성함을 더럽힌 자들을 어떻게 처벌합니까?
신에게 불복종한 저들을 어떻게 다룹니까?
신의 창문에 돌을 던진 자들에게
어떤 대답을 주겠습니까?
돌을 돌려줘야 합니다!”
그러고서는 아세프가 먼저 돌을 들어 여성의 머리를 후려치자, 나머지 탈레반들이 여성에게 돌을 던져 처형한다. 이슬람의 율법 샤리아를 집행하는 이 모습은 이슬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공산주의 세계 속에서 자행되었던 인민재판을 방불케 한다. 하지만 샤리아를 집행하는 그들 자신은 그것이 샤리아인 줄로만 알고 있다. 이것이 이들에게는 ‘법과 정의’였던 것이다.
또한 이것이 바로 한 세계관이 다른 세계관에게 좀 먹히는 방식이기도 하다.
지금 대한민국의 교회가 겪는 문제는 바로 기독교의 이름으로 목사 딱지를 붙이고 있는 아세프같은 네오막시스트들이다. 그들은 신의 이름으로 동족에게 돌을 던지고 죽도록 선동한다. 그들은 그것이 사타니즘인지도 모르고 있다. 하지만 신명기 법전을 보라! 이들의 선동과는 달리 확실한 증인이 ‘먼저’(רִאשׁוֹן) 돌을 들게 함으로써 그 법률이 공산주의식 샤리아 인민재판화 되는 것을 막고(신 13:9), 동시에 자비와 관용의 세계관을 요청하고 있다. 이미 모세의 시대로부터. (그럼에도 이들은 간음에 관한 그 모든 증언이 허위로 드러났음에도 자신들이 누구보다 ‘먼저’ 돌을 들었던 사실에 대한 일말의 뉘우침도 없다.)
지금 대한민국의 상황은 무엇인가? 주사파는 공산독재정권을 끌어들이려고 할 것이다. 네오막시스트들은 성혁명과 맘모니즘으로 자신들이 꿈꾸는 사회를 만들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두 세력은 기존의 세계(보수)를 무너뜨리는데 손을 잡았다. 일차적 목적은 같았지만 그들의 최종목적은 다르다. 그들 안에서 세계관의 충돌현상이 심화될 것이다. 그 와중에 국민들은 무지와 혼돈의 어둠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네오막시즘에 열광하는 이들은 사태에 눈을 뜨지 못한다. 대형교회들와 영향력있는 목사들은 종교화의 길로 걸어간다. 가짜들은 카펫을 깔기에 여념이 없다. 재벌들은 활로를 찾아 떠나갈 것이다. 적폐놀음과 사법농단은 이 나라가 망할때까지 기승을 부릴 것이다. 완장효과를 똑똑히 목격하는 거다.
이 영화에서는 아미르가 노예이자 이복동생인 하산의 후손을 목숨걸고 구해 모든 기울어진 사태를 회복하려는 노력 속에서 그의 무너진 세계는 복원되고 있다. 이것이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하는 "희망"이다. 이 땅의 '아미르' 들이 일어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