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의 샘터

애국가는 찬송가

이성수
2019-01-19
조회수 2423

 1896년 11뎔21일 서재필박사가 주도한 독립협회는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울것을 고종황제께 건의하여 윤허를 받고 정초식을 거행한다.

초청장을 보내고 청나라로부터의 완전독립을 축하하는 의미로 성대하게 정초식을 거행한다. 이때 배재학당학생들이 나와 조선가 독립가를 부른다. 

  배재학생들은 이듬해인 1897년 7월 배재학당 방학 예식에서 윤치호가 작사한 "무궁화가"를 부른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이는 애국가의 작사자가 윤치호임을 분명하게 입증하는 사실이다. 

 윤치호는 무궁화가를 작사할때 어떤 뜻을 가졌을까?  배재학당은 아펜젤러가 고종의 윤허와 휘호를 받아 설립한 기독교학교다. 그들이 불렀던 조선가  가사에는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나라 망하겠네. 하나님 이 나라를 도와주소서' 란 내용이 들어있다. 이 가사도 윤치호가 쓴 것이다. 조선가 작사 이후 무궁화가가 쓰여지는 사이 국내정세는 급변한다. 청나라의 오랜 지배(주인국)에서 해방된 기쁨도 잠시, 곧 일본의 본격적인 침탈야욕이 노골화되기 시작한다. 이 상황에서 윤치호가 생각한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이 나라가 기독교국가가 되는 것만이 부강한 나라를 이룩하는 유일하고도 시급한 일임을 온 국민들에게 알리고자 함이었다. 정말 그런 뜻이 무궁화가 속에 담겨 있을까?

 무궁화는 학명으로 Rose of sharon 이었다. 풀면 "샤론의 장미"다. 샤론은 저 멀리  이스라엘 땅에 있는 해안평야 이름이다. 그곳에서 피어나는 꽃은 북풍에 흔들릴때 주변의 가시에 찢기고 상하면서 사방 수십리에 향기를 날린다. 그 모습이 인류구원을 위해 몸을 찢으신 예수그리스도를 이미지화 하게 되는 것이다. 윤치호는 한국인 최초로 일본가서 영어를 배웠고 푸트공사의 통역관으로 고종황제 앞에서 통역을 하던 사람이다. 게다가 한국인 최초의 미국유학생이다. 신학과 인문학박사다.그리고 평생 영어로 일기를 썼다. 그러기에 로즈 오브 샤론이 곧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는 '삼천리 화려강산'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본래 무궁화는 해주이남에서만 피는 꽃이다. 윤치호가 이를 모를리 없다. 그런데 삼천리 화려강산이라 함은 무궁화로 상징된 예수그리스도가 한반도 전체와 대한백성 모두에게 충만해지기를 기도하는 마음을 담아낸 것이다. 

  무궁화가를 작사한지 7년 뒤인 1904년 가을에 영국 군함 한 척이 동양 각국을 순방하던 중 제물포(인천)항에 들어와 한국을 방문한 예의로 한국 국가를 연주하겠다고 제의해 와 이에 고종황제가 외무협판으로 있던 윤치호에게 즉시 국가를 제정하라는 분부를 내린다. 지금의 애국가의 기본틀이 이때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07년 감리교  찬미가가 윤치호에 의해 발행된다. 그중 14장에 무궁화가가 4절의 완성된 노래로 들어가 있다.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와 거의 일치한다. 애국가는 교회에서 찬송가로 예배시간에 불리워진 것이다. 

 그런데 이  잔송이 어떻게 애국가가 되었을까?  윤치호는 외무법관을 지낼때 남궁억과 함께 무궁화를 국화로 제정하는 운동을 펼친다. 그들의 노력에 의해 무궁화는 대한제국의 나라꽃으로 지정된다. 그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1894년 혹은 1900년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무궁화는 그들만의 결정으로 나라꽃이 된것이 아니다. 이미 신라,고려,조선시대를 거쳐오는 동안 민족정신을 상징하는 꽃으로 친숙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은근 끈기 인내를 상징하는 꽃말과 100일동안이나 피어 있는 꽃의 속성이 한민족의 기질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무궁화가는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랭사인 곡에 맞추어 불려지다가 1936년 작곡된 안익태의 코리아 환타지 곡에 맞추어 195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행사에 공식적으로 불리워진다.

 근자에 작사자 규명과 관련하여 논란이 있는 것은 윤치호 자신이 친일파로 몰리면서 이 노래가 폐기될것을 우려하여 자신의 작사임을 숨기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지랴? 누가 뭐래도 이 노랫말은 뜨거운 신앙심과 애국정신이 절절히 묻어나고 있다. 

*아래의 윤치호 육필본이  그의 친필로 확인되면서 애국가 작사자는 최종적으로 윤치호로 판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