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의 샘터

왕상13장의 예고

lee seongsu
2018-05-31
조회수 342

《왕상13장에 예고된 한국목사들의 최후》

 요즘 기독교계의 가치관 갈등문제가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인권조례안을 둘러싼 동성애  문제로부터 이념대립으로 이어진 갈등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거세게 불거지고 있다.

그것은

주적으로서의 북한과 동맹국으로서의 미국으로 통용되던 전통적 관계인식이 "평화협상"이라는 트랜드 앞에서 급속도로 녹아내리고 있는데 따른 혼란일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혼돈 현상은 목회자들 간의 상이한 가치관과 이념갈등의 표면화로 이어지면서  한국교회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우리가 평화를 말하기 전에, 정치인들이 벌이는 평화협상에 대해 찬반양론을 논하기  전에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유념해야만 할 일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고대 이스라엘의 분단에서 찾아낼수 있다. 공교롭게도 이스라엘의 남북분단 상황은 우리나라의 분단과 흡사하다. 분단된 한국을 남한과 북한으로 부르는 것처럼, 고대 이스라엘도 남왕국과 북왕국으로 불리운 것이 비슷하다.


 서로 전쟁도 하고 으르렁대다가도 정치적,종교적 이해관계에 따라 왕래도 하고 상호협력과 연합을 했던 것도 많이 닮았다.


하지만 다른 면 하나가 있다. 바로 선지자들의 태도이다. 그들은 남북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경고를 쏟아낸다.


 그동안 남한의 깨어있는 목회자들은 대개 이스라엘의 예언자를 본떠, 정권을 향한 추상과 같은 경고를 날려 왔다. 그 노력이 정치적 적폐를 무너뜨리는데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정말 이상하게도 그들이 북한의 적폐에 동일한 경고를 발했다는 보고는 매우 드물다. 오히려 학교, 과학, 의료 등 사회간접자본(SOC) 지원을 통해 선행시켜온 평화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인도주의라는 이름으로 시행되는 그 SOC 목록에는 심지어 북한 정권이 세운 가짜기독교 조그련 교회도 창구로 등장한다.


 남한 내의 적폐에 대해 그토록 가혹했던 선지자적 태도와는 다른 이 평화의 태도를 심각하게 짚고 넘어가지 않을수 없다. 왜냐하면 성서는 그것을 지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 왕국의 멸망이 북 왕국의 멸망보다 지연될 수 있었던 이유는, 남 쪽과 그 지역 선지자들이 특별히 더 신통했기 때문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먼저 무너진 북쪽에서 월남해 온 선지자들이, 남쪽 진영으로 점차 번지고 있는 멸망의 암운에 대해 경고로 가세했기 때문이다.


북쪽 예언자들이 남쪽으로 대거 유입되면서 이어간 이 예언자적 동질성에 덧붙여, 신명기 사가(史家)가 전해주는 남쪽 출신 어느 무명 예언자의 대북(對北) 사역은 우리 남한 내에서 예언자적 사역을 자처하는 목회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남쪽 정체성의 한 예언자가 북쪽에 가서 펼치는 왕상13장의 스토리는 우리에게 결여된 예언자적 직무로서 일관성의 전형을 제시한다.


 북 이스라엘의 벧엘 지역에 한 나이 든 선지자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들들에게서 남쪽 선지자 한 사람이 월북해서 왕에게 들어가 행한 일을 전해 듣는다. 남쪽에서 넘어온 선지자가 북쪽 왕의 죄를 물으면서, 왕의 팔을 굳혀버렸다가 다시 펴게했다는 사건이었다.


 아들을 통해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노선지자는 그 무명 선지자를 만나기 위해 서둘러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길을 나선다. 길에서 그 남쪽 선지자를 만나자 자기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며 유숙할 것을 권한다.


 하지만 남쪽에서 온 이 선지자는 거절한다. 하나님께서 예언을 선포하고 돌아오는 길에 결코 그 지역에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 하셨다는 것이다.


거듭되는 요청에도 이 무명의 선지자가 응하지 않자, 나이든 선지자는 자신도 같은 선지자라 밝히면서, 그를 대접하라는 계시를 하나님에게 받았노라고 거짓말을 한다.


결국 자신이 받은 계시 대신에 거짓 계시에 넘어간 남쪽 선지자는, 그만 이 일로 인해 사자에게 찢겨 죽고 만다.


열왕기상 13장 전체를 다 차지하는 이 난해한 이야기가 신명기 역사서에 산입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영진교수는 이에 대해 칼바르트의 주석을 인용한다.


칼 바르트는 그 답지 않게 독특하게도 성서신학적 필치 속에서 이 무명 선지자에 관한 주석 한 편을 남겼다.


바르트는 이 이야기에서 예언 또는 예언자적 직무가 'elect(선출직)'으로 작동하는지 'non‐elect(비선출직)'으로 작동하는지, 그리고 'profession(직업적 직무)'로 작동하는지 'confession(고백적 직무)'로 작동하는지, 이러한 대조를 통해 그 직무상 예언의 정위(正位)를 드러낸다고 주석했다.


북쪽 제단(벧엘)의 죄상이란 신성해야 할 제단 질서를 권력이 자기 마음대로 정하고(왕상 12:33) 제사장까지 임의로 임명함으로써(13:33), 신성적 직무로서 예언(자)의 선출(elect)을 가로막고(non‐elect) 고백적 직무로서의 예언자직(confession)을 가로막았다(profession)는 것이다.


 여기서

왜 남쪽선지자가 사자에 찢겨 죽는 참변을 당했을까를 생각해보지 않을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처지가 바로 오늘날의 남한쪽 목회자들이 받을수밖에 없는 징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 무명 선지자 이야기와 그에 관한 칼 바르트의 준규(準規)는 남북평화의 경계선상에 자리한 우리 한반도 남쪽 목회자들이 그동안 해온 예언자적 직무를 돌아보게 한다.


 우리 남한 쪽의 목회자 중 상당수가 그동안 저질러온 죄상은  

첫째,북쪽 정권의 적폐에 대해서는 아무도(이름 날린 유명한 목사들 포함) 어떠한 경고도 하지 아니함으로써 제대로 된 예언자적

직무를 유기해온 것이고,

둘째, 북쪽의 정권과 연합하여 인도주의라는 위장된 미명하에 가짜제단에 바쳤던 평화의 떡과 음료에 잔뜩 취해 있다는 점에서 이미 우상숭배자로 전락해 있고

셋째, 가짜계시에 속아 넘어가서 수많은 백성들의 눈과 귀를 가리워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했다.


 이러니 추하게 미친 애와 함께 크리스챤의 명패를 가지고도 진리앞에 침묵하고 북쪽왕의 불의에 대해 충직한 강아지노릇하는 인간들이  나서서 북쪽왕을 한반도의 대통령이라고 헛소리하는 지경까지 온 것이지. ㅉ 게다가 여기에 카펫까지 깔아주는 종북부역자 신학자 목회자들까지 자발즥으로 나서주고 있으니....


  내 백성을 떡 먹듯이 먹는 권력이 자기 마음대로 제정한 그 인위적(non‐elect/profession) 제단을 용인함으로써, 자신들도 직업적 종교인으로 전락하고 백성들도 혼란에 빠트린 것이다.


 이러니 사자에 찢겨 죽어 마땅하다. 그래도 왕상13장의 죽은 선지자는 계시만은 똑바로 전했다. 이후 처신이 문제였지. 현재의 남쪽 목회자들 중에는 아예 대놓고 충성맹세를 하기까지 하며 대다수는 아예 계시조차 분별하지 못하고 산다.


보라!  북쪽왕이 남쪽을 주장하게 되면 제일먼저 자기들에게 부역한 목회자들부터 찢을 것이다.


한번 배신자는 영원한 배신자이기 때문이고 짖지 않고 혓바닥만 놀리는 개는 보신용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금번에 출간된 태영호 前 공사의 저서(3층 서기실의 암호)에 나오는 "가짜 교회를 세워 예배를 드렸더니 진짜가 생겨나더라"는 전언은, 저 우상숭배자들과는 아무 상관관계가 없다.


(이영진교수글에서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