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의 샘터

지구종말과 "호라( ὥρα )"(때)

이성수
2017-12-10
조회수 1285
호라(ὥρα), 지구종말의 날(doomsday)

1992년 다미선교회가 전국을 강타할 당시 D-day가 임박하면서 전국이 난리가 났었다. 대중매체들도 초미의 관심을 보였다. 임산부들은 출산보다는 낙태를, 청년들은 취업보다는 교회/기도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늘어났고, 극성 추종자들은 전 재산을 헌납할 뿐 아니라 채권이나 부채를 포기하는 일도 속출했다.

지금의 신앙인들은 이 같은 시한부종말론을 모독으로 여기지만, 사실 시한부종말론보다 더 큰 문제는 고대하던 그 일이 무산되었을 때 나타난 2차 행태에 있다. 1992년 10월 28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그 날과 그 때’는 이스라엘 시간이었을 것이라며 하루를 더 초과하였다. 그마저 경과하자 사기죄/손배소를 제기하는 등 고소고발 사태가 연이어 벌어졌다. 이 같은 2차 행태가 왜 문제인가?

이와 유사한 종말소동은 중세의 첫 밀레니엄 시대에 유럽에서도 벌어졌다. 교황 실베스터 2세는 999년 12월 31일의 지구 종말을 공공연하게 선포하고 다녔는데 유럽 전역은 그야 말로 둠스데이(doomsday) 공포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회개의 징표로 집, 토지, 재물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부채를 탕감하며 심지어 죄수들도 석방했다. 그렇게 해서 999년 12월 31일 마지막 날 마지막 미사를 공포와 환희의 도가니로 맞았지만 끝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풀어준 죄수를 다시 잡아들이고 회개의 징표로 행했던 일들을 다시 환원하는 대혼란이 벌어진 것이다.

두 집단이 보인 종말에 대한 2차 반응의 문제는,왜 부채를 탕감하고, 죄수를 방면하였는가 하는 행위의 본질 문제이다. 여기서 질문이 여러개 나온다. 종말이 본질인가? 종말에 이르는 과정이 본질인가? 하나님 나라는 회개의 징표로서의 행위와 선행에 의해 도래하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기 때문에 회개와 선행이 일어나는가?

마가를 비롯한 복음서 저자들이 속했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들 역시, ‘그 날과 때’가 불발이 된 경험을 안고 있었다는 사실을 유념해봐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날과 그 때’에 관한 다음과 같은 고도의 문법을 구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들도 모른다. 아버지만 아신다.”

다미선교회 본부장이던 이장림은 위 본문에 대해 이르기를 “삼위일체이신 아들이 아무려면 아버지가 알고 계신 그 날과 때를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셨겠느냐?”며 택한 자들은 노아처럼 미리 알 수 있고 그들이 바로 자신들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본문은 ‘때’(시간)를 언급했다 해서 그야말로 문자적 ‘때’를 뜻하는 그런 하류문장이 아니라, 전적인 ‘자기 겸손’의 선언임을 알아야 한다. 이를 신학 용어로 케노시스(κένωσις)라 부른다. 이 말뜻은 ‘자기비하’다.

케노시스라는 말은 빌립보서 2장 7절에 나오는 에케노센(ἐκένωσεν)이 잘 드러낸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즉, 자신을 ‘비운다’(self-emptying)는 이 케노시스 개념이 ‘때’(시간)를 비우는 경지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때를 모른다”="때를 비운다"

자신이 “때를 안다”고 하는 선언이 그 얼마나 허황되며 악의적이면서 악질한지를 상기한다면, “때를 모른다!”는 그 빛(Advent)과 만나기 어렵지 않다. 때를 알고 있다는 말은 그 본질상 ‘비울 줄 모르는 행태’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기를 비울 수 있는 권능을 소유한 자만이 ‘시간을 비우는데’도 능하다.

“그 날과 때는 아들은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는 이 케노시스 최고의 결실은 이 종말의 계시가 (유대인이나 헬라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계시로 거듭났다는 사실에 있다.

겸손한 자기비움하여 ‘때’를 비우는 바람에 그 ‘때’가 ‘모든 사람의 시간’으로 변모(morfe)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크로노스(Χρόνος)와 카이로스(καιρός)라는 거대한 양립의 시간 개념을 가르는 적합성의 시간 "호라"(ὥρα)의 개념이다.
막을 수 없는 기관차 같은 시간을 ‘크로노스’,
그 기관차를 절개해 자르고 크로노스를 정지시키는 시간을 ‘카이로스’,
그리고 적합한 시간을 ‘호라’라고 정의하는데,
아들이 “모른다”고 했던 그 ‘때’를 유독 ‘호라’라 칭한 것은 그것이 바로 ‘모든 사람’의 시간인 현재를 이르는 말인 까닭이다.
모든 사람은 현재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이 호라의 적용이 다미선교회와 같은 극단적 종말 집단에서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 교회를 떠난 오래된 신자가 하는 소리를 들었다. “내가 이 교회에서 한 일들은 무게로 다 잴 수 없는 것들”이라며 억울해 하는 소리였다. 이 신자보다 신급이 다소 낮은 다른 신자도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 교회에다 그동안 헌금을 얼마를 했는데, AC.”

하나님 나라는 무게로 다 달 수 없는 공로의 중량에 의해 도래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기 때문에 무게로 달 수 없는 공로를 세우는 것인가?
또, 하나님 나라는 헌금을 착실하게 입금함으로써 도래하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기 때문에 기꺼이 헌금을 하는 것인가? 이에 대해 충고한다면 분노하지 않을 만큼만 공로를 세우고 헌금하시라 이다.

이 호라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전쟁, 기근, 질병, 지진 가까이에 와 있다고 했다. 대개의 맑시스트/공산주의자는 스스로 전쟁과 기근과 지진을 일으켜서 하나님의 나라를 도래시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상기의 분노에 찬 시한부종말론자들의 행태와 비슷한 것이기도 하다.

이 호라의 종말은 종교와 사회만이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도 벌어지는 시간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직장 가정에서, 그동안 살아온 나의 시간이 허망하다고 여겨질 때 하나님의 궁궐은 호라와 함께 날아가버리고 마는 시간 구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