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서 종말에 관해 아버지 외에는 그 ‘날과 시’ 를 알지 못한다는 말씀 중에서 ‘시’에 관해 살폈는데, 하는 김에 이번에는 ‘날’(ἡμέρα)에 관한 내용을 보겠다.
우릭가 날마다 맞이하는 일반적인 날들은 호라(ὥρα)와 별차이가 없다. 반면, “지난 토요일은 내 딸이 시집간 날ㅡ”이라고 하였을 때, 이는 보통때보다 강력한 ‘날’의 의미를 갖는 특별한 날이 된다.
헤메라(ἡμέρα)의 기본 개념은 일상적으로 맞이하는 날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를 가진 날이다. 성서에서의 그 날은 상기와 같은 개인적인 날 정도가 아니다. 이는 사회적,종교적인 차원을 넘어, 우주적인 결정의 날이다. 콕 집어 보자면
1) 주님이 오신 날
2) 주님이 죽으신 날, 다시 살아나신 날
3) 주님이 다시 오실 날 이다.
물론 이것이 우주적인 날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에게는 (설령 그가 교인이라 할지라도) 아무 날도 아닌데 무슨 우주적인 날 어쩌고 하느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말귀를 알아들으면 복이다. 이러한 ‘날’에 내재된 속성은 우리가 상상하는 차원을 능가한다. 성경은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
즉 ‘날’은 ‘하루’에 불과하다. 그러나 천 년의 길이를 갖는 능력이 있다.
같은 하루지만 10-20대의 하루와 3-40대의 하루와 5-60대 그리고 70대의 하루는 그 각각이 완전히 다른 길이를 갖는다. 연령뿐 아니라, 자신의 지위에 따라서도 그 길이는 달라진다. 채권자에게는 원리금 받는 날이 더디 도래하지만 채무자에게는 살같이 빠르다. 이것이 날 곧, 헤메라의 개념인 것인데 알것 같지만 생각보다 잘 알지 못하는 맹점 같은 개념이다.
이 개념에 대한 오해, 혹은 무지가 연옥,지옥 또는 음부 하강 교리를 낳았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벧전 3:19)
이 대목을 카리켜 주님께서 지옥에 내려간 일이 있으시다는 설과(가톨릭, 루터, C. 비그, M. 헌터) 결코 지옥에 간 일이 없으시다(칼빈, 바빙크)는 설로 갈린 것이다.
하지만 이는 헤메라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옥에 있는 영들’이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그 다음 구절이 중요한데(“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여기서 핵심은 ‘복종하지 아니하던...’ 이라는 문장인데 분사구문 시제가 부정과거(aorist)로 표현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아오리스트라 불리는 이 단어는 현대 언어에는 없는 문법으로, ‘부정과거’라는 문자 그대로 정함이 없는 동작을 나타내는 단순한 과거이기 때문에 시간 개념이 매우 강력한 표현이다. 어떤 한계(limit)를 뜻하는 오리스토스(οριστος)에 부정을 뜻하는 접두(ἀ-)가 붙어서 된 이 시상 개념은,
‘복종하지 아니하던’ 그 행위가 이미 끝나버린 과거완료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행위임을 나타낸다. 따라서 ‘방주를 준비할 동안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은 노아 시대만이 아닌 예수님 시대에도 존재하는 것이고, 지금 우리 시대에도 계속 존재하는 것이다.
이같은 시상 개념을 노아의 ‘날’ 즉, 헤메라(ἡμέρα)가 받혀주고 있다. 이는 또한 ‘옥’을 지옥이 아닌 갇힌 공간 퓔라케(φυλακή)로 쓴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서 '옥'은 바로 ‘헤메라’ 시간으로서 시간을 공간화하는 기법을 발휘한 것이다.
인간은 ‘날’이라는 공간에 갇혀 살면서 여전히 하나님의 구원의 부르심에 복종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이 천년과 하루로서의 헤메라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지구의 나이가 6천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과학과의 투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는 믿음 좋은 반과학적 행위라기보다는, 도리어 지극히 과학적 행위들이다. 헤메라를 하루가 아닌 과학적 시간(24h)의 공간(옥)안에 가두어 버리기 때문이다.
헤메라에 정관사 호(ὁ)가 붙으면 ‘쎄메론’(σήμερον) 즉 ‘오늘’이 된다. 지금 막 발생한 오늘. 이 쎄메론이 들어간 문장이 바로 다름 아닌,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이다.
여기서 오늘이란, 어제인가 오늘인가 내일인가?
도저히 특정할 수 없는 날이다. 그래서 ‘그 날’은 아버지만 아시는 것이다.
문제는 ‘그 날’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변명할
수 없다는...
* 벧후 3:3-15a (cf. 사 40:1-11; 시 85:1~2, 8~13; 막 1:1-8.)
우릭가 날마다 맞이하는 일반적인 날들은 호라(ὥρα)와 별차이가 없다. 반면, “지난 토요일은 내 딸이 시집간 날ㅡ”이라고 하였을 때, 이는 보통때보다 강력한 ‘날’의 의미를 갖는 특별한 날이 된다.
헤메라(ἡμέρα)의 기본 개념은 일상적으로 맞이하는 날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를 가진 날이다. 성서에서의 그 날은 상기와 같은 개인적인 날 정도가 아니다. 이는 사회적,종교적인 차원을 넘어, 우주적인 결정의 날이다. 콕 집어 보자면
1) 주님이 오신 날
2) 주님이 죽으신 날, 다시 살아나신 날
3) 주님이 다시 오실 날 이다.
물론 이것이 우주적인 날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에게는 (설령 그가 교인이라 할지라도) 아무 날도 아닌데 무슨 우주적인 날 어쩌고 하느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말귀를 알아들으면 복이다. 이러한 ‘날’에 내재된 속성은 우리가 상상하는 차원을 능가한다. 성경은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
즉 ‘날’은 ‘하루’에 불과하다. 그러나 천 년의 길이를 갖는 능력이 있다.
같은 하루지만 10-20대의 하루와 3-40대의 하루와 5-60대 그리고 70대의 하루는 그 각각이 완전히 다른 길이를 갖는다. 연령뿐 아니라, 자신의 지위에 따라서도 그 길이는 달라진다. 채권자에게는 원리금 받는 날이 더디 도래하지만 채무자에게는 살같이 빠르다. 이것이 날 곧, 헤메라의 개념인 것인데 알것 같지만 생각보다 잘 알지 못하는 맹점 같은 개념이다.
이 개념에 대한 오해, 혹은 무지가 연옥,지옥 또는 음부 하강 교리를 낳았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벧전 3:19)
이 대목을 카리켜 주님께서 지옥에 내려간 일이 있으시다는 설과(가톨릭, 루터, C. 비그, M. 헌터) 결코 지옥에 간 일이 없으시다(칼빈, 바빙크)는 설로 갈린 것이다.
하지만 이는 헤메라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옥에 있는 영들’이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그 다음 구절이 중요한데(“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여기서 핵심은 ‘복종하지 아니하던...’ 이라는 문장인데 분사구문 시제가 부정과거(aorist)로 표현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아오리스트라 불리는 이 단어는 현대 언어에는 없는 문법으로, ‘부정과거’라는 문자 그대로 정함이 없는 동작을 나타내는 단순한 과거이기 때문에 시간 개념이 매우 강력한 표현이다. 어떤 한계(limit)를 뜻하는 오리스토스(οριστος)에 부정을 뜻하는 접두(ἀ-)가 붙어서 된 이 시상 개념은,
‘복종하지 아니하던’ 그 행위가 이미 끝나버린 과거완료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행위임을 나타낸다. 따라서 ‘방주를 준비할 동안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은 노아 시대만이 아닌 예수님 시대에도 존재하는 것이고, 지금 우리 시대에도 계속 존재하는 것이다.
이같은 시상 개념을 노아의 ‘날’ 즉, 헤메라(ἡμέρα)가 받혀주고 있다. 이는 또한 ‘옥’을 지옥이 아닌 갇힌 공간 퓔라케(φυλακή)로 쓴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서 '옥'은 바로 ‘헤메라’ 시간으로서 시간을 공간화하는 기법을 발휘한 것이다.
인간은 ‘날’이라는 공간에 갇혀 살면서 여전히 하나님의 구원의 부르심에 복종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이 천년과 하루로서의 헤메라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지구의 나이가 6천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과학과의 투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는 믿음 좋은 반과학적 행위라기보다는, 도리어 지극히 과학적 행위들이다. 헤메라를 하루가 아닌 과학적 시간(24h)의 공간(옥)안에 가두어 버리기 때문이다.
헤메라에 정관사 호(ὁ)가 붙으면 ‘쎄메론’(σήμερον) 즉 ‘오늘’이 된다. 지금 막 발생한 오늘. 이 쎄메론이 들어간 문장이 바로 다름 아닌,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이다.
여기서 오늘이란, 어제인가 오늘인가 내일인가?
도저히 특정할 수 없는 날이다. 그래서 ‘그 날’은 아버지만 아시는 것이다.
문제는 ‘그 날’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변명할
수 없다는...
* 벧후 3:3-15a (cf. 사 40:1-11; 시 85:1~2, 8~13; 막 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