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는 생명체가 살기에 최적화된 곳이다. 우주가운데 유이무이하다. 그라나 지구가운데도 생명체가 살기 어려운 극한의 환경을 지닌 곳들이 있다, 남극,북극, 그리고 사막이다.
지구 표면의 70%는 물이다. 30%만 땅인데 그 땅 가운데 33%는 완전 건조 하거나 반(半) 건조 상태이다. 완전 사막이거나 사막화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사막화의 요인은 보통 난개발로 알려져 있다. 환경 학자들은 연 600만 헥타르가 사막화 되어가고 있으며 피해 인구는 연 1천7백만 명이라고 보고한다. 그리고 이런 문제의 진범으로 주로 지목되는 것이 온난화이고 이는 탄소량 증가이고 이는 주로 탄소배출공장, 자동차가 거론된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의 결론은 항상 '빙하가 녹아 지구의 종말이 온다' 식이다.
그런데 이러한 ‘빙하가 녹고 있다’식 통계는 환경론자 특유의 종말론에 힘입어 ‘탈 원전’ 운동의 계몽 자료 서문에도 등장하는 실정이다. ‘토지의 사막화=중공업’ 이라는 식이다.
하지만 지구의 사막화는 공업이나 원전과는 별 상관도 없는 문제다. 사막화는 공업 이전에 농업의 결과였다. 흔히 현대인에게 ‘농경인’ 하면 절대 순수, 절대 약자로 인식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공업 사회가 농경 사회를 밀어낸 결과다. 그러나 실상 유목 사회를 밀어낸 것이 바로 농경인이었다. 성경을 보라. 농경인인 가인이 유목인인 아벨을 살해했다.
유목민은 언제나 이삿짐을 싸야 하는 처지였지만, 농경인은 정착을 통해 안정된 생활이 가능했기에 유목민보다 압도적으로 공격적인 사회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목민은 자연의 변화를 따라 이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 비해 농경인은 자연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었다. 하늘의 비가 불규칙할 때는 지하의 물을 꺼내 쓸 수 있었다. 또는 물을 저장하거나 댐을 막았다. 바로 이것이 사막화의 주범이 된 것이었다.
지표에서 깊은 땅속에 있을 때엔 토지의 수분을 제공할 수 있었던 물이 농경으로 인해 지표 위로 끌어올려졌을 때에는 작물을 위한 수분 외에도 무차별적인 증발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땅을 급속하게 말려버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농경을 위한 벌목은 일차적으로 구름을 멀리 쫓아버리는 직격탄이 되었다. 흔히 우리는 상식적으로 비가 와야만 나무가 자란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반대로 나무가 비구름을 불러 오는 것이다.
또한 신체의 70%를 물로 채우고 있는 인간의 사막화 역시 공교롭게도 위와 같은 도식을 따른다. 물질의 고갈 또는 결핍이 인간을 사막화시켜 버리는 것 같지만 실상은 물질이 표면 위로 차올라 증발에 노출되는 순간부터 사막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유목민과는 달리 값싸게 물을 마시고 버릴 수 있는, 값싸게 전기를 쓸 수 있는, 값싸게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한마디로 자연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이 현대적 개념의 농경인들은 아주 가난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부자도 아닌 까닭에서 오는 막연한 콤플렉스에 그만 자기 자본을 낭비/방출하려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기갈병, 갈증에 노출된 신농경사회가 불러온 사막화를 가속화시키는 주범이다.
이 간조한 땅, 광야에서 물이 나려면 반석을 찾아내서 치는 방법 외엔 없다. 반석의 하부는 그나마, 물이 모두 빠져버리거나 증발해버리고 마는 광활한 광야 가운데서도 물을 담수(湛水)하고 있는 유일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말은 바로 “너는 그 반석을 치라”(출 17:6)는 말이었던 셈이다. 이 반석의 물은 간조한 땅에 거하는 200만이 넘는 백성들의 생명수가 되었다. 겔 47장은 성전에서 나는 물이 만국을 소성케 하였다고 증언한다. 특히 성전 물은 간조하여 생명력을 상실한 곳에 생명을 회복시켰다. 이것이 반석/교회의 유래가 되었다. 교회는 간조한 땅에서 생명을 회복시키도록 존재하는 것이다.
지구는 생명체가 살기에 최적화된 곳이다. 우주가운데 유이무이하다. 그라나 지구가운데도 생명체가 살기 어려운 극한의 환경을 지닌 곳들이 있다, 남극,북극, 그리고 사막이다.
지구 표면의 70%는 물이다. 30%만 땅인데 그 땅 가운데 33%는 완전 건조 하거나 반(半) 건조 상태이다. 완전 사막이거나 사막화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사막화의 요인은 보통 난개발로 알려져 있다. 환경 학자들은 연 600만 헥타르가 사막화 되어가고 있으며 피해 인구는 연 1천7백만 명이라고 보고한다. 그리고 이런 문제의 진범으로 주로 지목되는 것이 온난화이고 이는 탄소량 증가이고 이는 주로 탄소배출공장, 자동차가 거론된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의 결론은 항상 '빙하가 녹아 지구의 종말이 온다' 식이다.
그런데 이러한 ‘빙하가 녹고 있다’식 통계는 환경론자 특유의 종말론에 힘입어 ‘탈 원전’ 운동의 계몽 자료 서문에도 등장하는 실정이다. ‘토지의 사막화=중공업’ 이라는 식이다.
하지만 지구의 사막화는 공업이나 원전과는 별 상관도 없는 문제다. 사막화는 공업 이전에 농업의 결과였다. 흔히 현대인에게 ‘농경인’ 하면 절대 순수, 절대 약자로 인식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공업 사회가 농경 사회를 밀어낸 결과다. 그러나 실상 유목 사회를 밀어낸 것이 바로 농경인이었다. 성경을 보라. 농경인인 가인이 유목인인 아벨을 살해했다.
유목민은 언제나 이삿짐을 싸야 하는 처지였지만, 농경인은 정착을 통해 안정된 생활이 가능했기에 유목민보다 압도적으로 공격적인 사회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목민은 자연의 변화를 따라 이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 비해 농경인은 자연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었다. 하늘의 비가 불규칙할 때는 지하의 물을 꺼내 쓸 수 있었다. 또는 물을 저장하거나 댐을 막았다. 바로 이것이 사막화의 주범이 된 것이었다.
지표에서 깊은 땅속에 있을 때엔 토지의 수분을 제공할 수 있었던 물이 농경으로 인해 지표 위로 끌어올려졌을 때에는 작물을 위한 수분 외에도 무차별적인 증발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땅을 급속하게 말려버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농경을 위한 벌목은 일차적으로 구름을 멀리 쫓아버리는 직격탄이 되었다. 흔히 우리는 상식적으로 비가 와야만 나무가 자란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반대로 나무가 비구름을 불러 오는 것이다.
또한 신체의 70%를 물로 채우고 있는 인간의 사막화 역시 공교롭게도 위와 같은 도식을 따른다. 물질의 고갈 또는 결핍이 인간을 사막화시켜 버리는 것 같지만 실상은 물질이 표면 위로 차올라 증발에 노출되는 순간부터 사막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유목민과는 달리 값싸게 물을 마시고 버릴 수 있는, 값싸게 전기를 쓸 수 있는, 값싸게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한마디로 자연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이 현대적 개념의 농경인들은 아주 가난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부자도 아닌 까닭에서 오는 막연한 콤플렉스에 그만 자기 자본을 낭비/방출하려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기갈병, 갈증에 노출된 신농경사회가 불러온 사막화를 가속화시키는 주범이다.
이 간조한 땅, 광야에서 물이 나려면 반석을 찾아내서 치는 방법 외엔 없다. 반석의 하부는 그나마, 물이 모두 빠져버리거나 증발해버리고 마는 광활한 광야 가운데서도 물을 담수(湛水)하고 있는 유일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말은 바로 “너는 그 반석을 치라”(출 17:6)는 말이었던 셈이다. 이 반석의 물은 간조한 땅에 거하는 200만이 넘는 백성들의 생명수가 되었다. 겔 47장은 성전에서 나는 물이 만국을 소성케 하였다고 증언한다. 특히 성전 물은 간조하여 생명력을 상실한 곳에 생명을 회복시켰다. 이것이 반석/교회의 유래가 되었다. 교회는 간조한 땅에서 생명을 회복시키도록 존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