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의 샘터

성지에세이16. 엔게디.새끼염소와 춤을

이성수
2017-04-01
조회수 2794
엔게디는 새끼 염소의 샘이라는 뜻이다. 유대광야가 이어지다가 사해쪽에서 거대한 단층과 계곡을 형성한 곳이 엔게디이다. 황량한 석회석 산지로 이루어진 유대광야에서 몇개 안되는 오아시스다. 나할 다비드와 아루속, 슐라밋과 엔게디 등 4개의 샘이 모여 이룬 오아시스다. 엔게디의 물은 사해 주변에서 유일한 담수다. 그래서 이곳에는 광야에서는 볼 수 없는 온갖 꽃과 나무로 우거져 있다. 1년에 300만ℓ의 물을 쏟아내는 샘 주변에 900여종의 나무들이 자라고 있고 200여종의 새들이 서식하고 있다. 이곳에 서식하는 아이벡스(야생염소)의 앙증맞은 모습은 카메라를 들이대게 만든다. 풍요로운 수자원 덕분에 주전 3천년 이전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한다
엔게디는 예루살렘에서 동남쪽으로 50㎞ 떨어져 있으며 엔게디 남쪽으로 16㎞ 떨어진 곳에는 마사다가 있다.엔게디란 이름은 4개의 샘이 모여 만들어진 오아시스와 주변에 모여든 야생염소들에서 이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히브리어로 ‘엔’은 샘이며 ‘게디’는 새끼염소를 말한다.
성서는 엔게디를 하사손다말이라고도 부르는데(대하 20:2), 하사손다말은 대추야자의 하사손(아마도 사람 이름)이라는 뜻이다. 엔게디 주변에서 대추야쟈나무를 키우는 과수원을 많이 볼 수 있다. 이 지역의 풍요로움은 성서에도 기록돼 있다. 아가서 1장 14절은 자신의 사랑하는 자가 마치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 같다고 비유하고 있다.
하사손다말 즉 엔게디는 아브라함 시대에는 아모리 족속의 땅이었다(창 14:7). 후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지파에게 땅을 분배할 때는 광야의 다른 다섯 성읍(벧 아라바·밋딘·스가가·닙산·소금 성읍)과 함께 유다 지파에 분배된다(수 15:62).
특히 이곳은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으로서 전략적 요충지였다. 다윗 시대에 이곳에는 이미 요새가 있었다(삼상 23:29). 엔게디를 유명하게 한 성서 사건이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피해 도망간 곳이 엔게디의 요새였다. 사무엘상 24장은 사울과 다윗의 추격 과정을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다윗이 엔게디로 도망갔다는 소식을 들은 사울은 3천명의 추격대를 끌고 온다. 사울이 추격해오자 다윗과 부하들은 엔게디의 한 동굴로 숨어 들어갔다. 이 굴은 험난한 바위 절벽에 있는 것으로 오직 야생 염소들만이 접근이 가능한 곳이었다. 이 동굴들은 지금도 엔게디계곡의 절벽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 동굴까지 샅샅이 뒤지던 사울은 발을 가리기 위해 굴 안으로 들어갔는데 마침 이곳에 다윗이 숨어 있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이 절호의 기회에 단지 그의 옷자락 끝만을 잘라내고 사울이 동굴밖으로 나가자 높은 절벽에 올라가 소리친다. 내가 당신을 해할수 있었으나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자이기에 해하지 않았다고....사울은 그를 해치지 않으리라 약속한 후 돌아갔고 다윗은 다시 엔게디 요새로 가서 머물렀다.
200년 후 여호사밧 시대에 이 요새는 사해 동쪽 아람에서 유다를 치기 위해 온 무리들에게 점령당하고 말았지만(대하 20:2), 나중에 다시 유다가 재탈환한다.
엔게디가 유명해진 것은 신약시대 이후이다. 신약 성서에서는 등장하고 있지 않지만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곳은 로마 왕실 소유의 주요 도시였다. 오직 이 지역에서만 자라는 나무의 송진에서 생산할 수 있었던 값비싼 발삼 덕분에 이 도시는 경제적 부요를 누리게된다.
주후 70년 이스라엘 멸망 이후에도 일부 유대인들은 이곳에서 발삼을 생산하여 풍요를 이어갔다. 주후 4세기 가이사랴의 주교 유세비우스는 엔게디에 상당히 큰 유대인 마을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주후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유대인 박해 당시 이 마을은 불길 속으로 사라진다.
1848년 미국의 발굴조사팀이 엔게디의 위치를 밝혀냈다. 발굴은 1960년대 히브리대학교 마잘 교수(B Mazar)가 시작해 지금까지도 진행되고 있다.이곳 바위절벽위에서는 고대의 신전이 발견되었고 샘 아래쪽 평지인 텔 고렌에서는 주전 7세기쯤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성서시대의 마을이 발견된다. 이곳에서 이스라엘 왕실 인장이 찍혀 있는 항아리들과 함께 여러 가정용 용기들이 발견되었다. 이 시대에 화폐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은 조각을 가득 담은 항아리는 마을이 경제적인 거래가 이루어진 부유한 곳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 마을은 남왕국 유다가 멸망한 후 주전 5∼4세기 페르시아 시대에 큰 마을로 성장한다. 이때부터 마을은 발삼의 생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주전 1세기부터 주후 1세기 사이 엔게디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흔적은 로마 왕실 소유의 중요한 도시로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광야에 흩어져 있다가 식량이 필요할 때 급습할지도 모르는 유목민들에게서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성벽과 탑들이 세워졌다.
엔게디가 가장 번영한 시기는 주후 2∼6세기다. 도시는 로마 황실의 소유였지만 거주민은 유대인이 다수였다. 이곳에서 생산된 발삼은 값비싼 향수와 의료를 위한 연고로 사용이 되었다. 대추야자나무와 다양한 열대나무에서 생산되는 과일은 도시를 부유하게 했다. 산지를 이용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계단식 농경과 관개시설도 발전했으며 넘쳐나는 농산품들을 관리하기 위한 행정체제도 발전했다.
도시의 부유함은 유대인들의 회당에서도 발견된다. 사다리꼴 모양의 회당은 예루살렘을 향해 건축되었다. 회당이 가장 컸을 때는 서쪽 길이만 16m나 되는 상당히 큰 2층 건물이었다. 모자이크로 꾸며진 바닥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인물과 히브리어, 아람어로 가득했다. 바닥을 장식한 기록 중 도시의 비밀을 발설하는 자에 대한 경고가 있다. 비밀이란 아마도 이 도시를 살찌우게 했던 발삼 향수와 연고를 만들어내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1996년에 이루어진 발굴로 텔 고렌 북서쪽 작은 샘 주변에서 돌로 지은 30개의 방들이 발견되었는데, 일부 학자들이 이곳이 주전 2세기∼주후 1세기 사이 이스라엘의 종파들 중 공동체를 이루고 광야에서 고립된 생활을 했던 에세네파의 거주지라는 새로운 주장을 하고 있기도 하다. 야자수 솦이 우거진 공원에서 바라다 보이는 사해바다는 동화나라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그곳에서 각종 나무가 우거진 계곡을 따라 한시간쯤 올라강션 폭포에 도달한다. 두돌아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계곡과 골짜기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방을 가득 메운 병풍절벽에는 수많은 동굴들이 시커먼 구멍을 점점이 드러낸다. 그 동굴중의 하나가 다윗 드라마의 현장이리라. 세월은 지나도 그 현장은 여전하다. 3천년의 시간을 흘러 동방의 순례자가 이곳에 오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